극동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항은 한자 지명으로 '해삼위(海蔘威)'다. 1860년 제정 러시아가 이 항구를 군사기지로 만들면서 '블라디보스토크'라고 이름을 지었다는데, 이는 곧 '동방을 다스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 블라디보스토크는 극동 태평양 조르토이로그 만이라고 부르는 금각만을 중앙에 안고, 그 좌우에 큼직한 아무르만과 우수리만을 거느린 매우 이상적인 천혜의 항구다. 이 블라디보스토크는 중국의 상하이나 하와이의 진주만,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와 견주는 세계적인 아름다운 항구로서 지금도 러시아 극동함대가 자리 잡고 있다.
한국 근대사에서 이 블라디보스토크는 나라를 빼앗긴 한민족이 조국광복을 도모하기 위한 국외기지로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특히 1900년 전후부터 1919년 3·1 운동 때까지 그곳은 한민족의 국외독립운동의 메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안중근,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다
1909년 10월 18일, 그날 안중근은 갑자기 아무 까닭도 없이 마음이 울적해지며 초조함을 이길 수 없어 연추(煙秋, 지금의 크라스키노)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날 안중근은 당시 한인들이 많이 몰려사는 꼬레아스카야(신한촌) <대동공보>사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곧장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한다.
안중근은 동지 우덕순을 포섭하여 이석산에게 100원의 거사자금을 강탈한 뒤 1909년 10월 21일 아침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하얼빈으로 가고자 우스리스크 행 열차를 탄다.
꼭 100년이 지난 2009년 10월 28일, 나는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행장을 추적했다. 나는 먼저 블라디보스토크 역으로 가서 하얼빈 행 열차 승차권을 산 뒤 100년 전, 안중근이 찾아간 <대동공보사>가 있었다는 개척리 마을로 갔다.
이 일대 거리는 현재는 포브라니치나야 거리라고 부르는데, 지난날에는 '둔덕마퇴'로 불렀던 우리 동포들의 첫 정착지였다고 한다. 사학자 윤병석 교수는 동포들이 이 일대에다 한인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해조신문>과 이를 이은 <대동공보>를 간행하면서 항일 언론을 폈으며, 각종 항일단체를 조직하여 공동 항일전선을 구축하였다고 개척리의 역사를 밝히고 있다(윤병석, <해외사적탐방기>).
그런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 탓인지 지금도 그 일대에는 오래된 건물이 무척 많았다. 나의 안내인은 포브라니치나야 거리의 한 붉은 벽돌로 된 낡은 3층 건물 앞에서 그 일대가 대동공보사가 있었던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이라고 했다. 지금도 구석진 건물 실내에서 낡은 인쇄기가 돌아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