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케로, <수사학> 안재원 옮김. 요즘 라틴어 원전이 우리 말로 번역되어 나 같은 비전문가들도 이런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우리의 인문학자들이 이런 책을 더욱 열심히 번역할 수 있도록 그들을 격려하는 풍토가 필요하다.
도서출판 길
키케로의 웅변술은 소위 수사학이라는 이름으로 완성되었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말하는 방법'에 관한 그의 이론이다. 그는 말년에 이것을 책으로 썼는데, 그것이 <수사학>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Partitiones Oratoriae>라는 책이다. 지금 이 책은 한국에서도 원전이 번역되었다. <수사학: 말하기의 규칙과 체계>(안재원 편역)이라는 책이다.
말이 나왔으니 간단히 우리나라의 키케로에 대한 연구에 대하여 한마디 하자. 최근 들어 우리나라의 서구 인문학에 대한 연구는 해가 다르게 진일보하고 있다. 대학에 있는 사람으로서 이런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안다. 한국 대학은 온통 대학경쟁이라는 마술에 걸려 순수한 인문학은 고사 직전에 있다.
그럼에도 인문학자들 중 일부는 그것과 상관없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으니 경의를 표할 일이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 그런 분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내가 어찌 키케로의 원전에 다가갈 수 있었을까. 이 기회를 빌려 감사를 드린다.
과거의 라틴 고전번역은 일본을 통한 중역이 대부분이었는데 이제는 우리 연구자들이 라틴어와 희랍어를 공부해 원전을 번역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키케로의 저작에 대해서는 10여 년 전에 서울대의 허승일 교수(로마사 전공)가 중심이 되어 만든 키케로 학회가 있다. 이 학회는 매주 라틴원전 독회를 개최하여 그 결과를 하나하나 우리 말로 번역해 왔다. 순수 인문학자들의 열정이 빚어낸 아름다운 결실이다.
수사학을 제대로 배우지 않는 나라... 민주주의가 위험하다이제 수사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웅변술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우리나라에서도 웅변이란 말이 있고 내가 초등학교 시절인 1970년대 초반에는 웅변대회라는 것이 전국 여기저기에서 열렸다. 지금 생각해 보니 웅변대회라는 것이 대부분 정부시책을 홍보하는 용도로 개최된 것인데, 당시 나는 그 취지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몇 번 대회에 나갔다. 6·25 기념 반공 웅변이나 혼분식 장려 웅변대회에서 목청을 높인 게 기억 저편에서 아스라히 떠오른다.
이 당시 웅변대회에서 상을 받기 위해서는 일단 목소리가 좋아야 하고, 클라이맥스 부분에서는 손을 하늘 높이 뻗으며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웅변에 대한 나의 기억은 그런 것이었다. 웅변이 무엇인지 대해서는 도대체 배운 바 없이, 선생님이 써 준 원고를 달달 외고, 날 달걀로 목을 축인 다음, 과장된 몸짓을 섞어 큰소리를 치는 것, 그것이 내 웅변 역사의 전부였다.
하지만 웅변은 그런 것이 아니다. 웅변(雄辯)은 말 그대로 '최고의 말'이다. 웅변의 목적은 내 생각을 청중에게 전하며 공감을 호소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내 말에 따라 청중이 움직이도록 하는 힘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웅변은 그 구성이 잘 조직되어야 하고 논리적이어야 한다. 거기에다 청중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감정이 들어가야 한다. 따라서 웅변은 논리와 감성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적절히 조화를 이룬 언어의 예술이다.
나는 요즘 우리나라의 교육에서 가장 잘 안 되고 있는 것이 수사학과 관련된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현대는 그 어느 때보다 소통이 중요한 시대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선거에 출마할 때마다 소통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 소통을 강조하는 사람도 일단 당선만 되면 마이동풍이다. 도대체 커뮤니케이션이 안 된다. 이 말 하면 딴말 하니 기가 차고, 말하는 것을 잘 들어 보아도, 도대체 그 말의 진의를 알기 어려울 때가 많다.
소통이 민주주의 발전의 요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니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소통교육을 해야 한다. 소통교육은 무엇으로 해야 할까. 그것은 말과 글로써 해야 한다.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의사를 말과 글로써 적절히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이 안 된다.
우리나라는 대학교육이 보편화된 세계 제일의 나라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80% 이상의 젊은이들이 대학을 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쓰고 있는 말과 글을 면밀히 분석하면 소통이 매우 힘든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대학입학시험 논술고사라는 것이 있지만 이것은 소통능력을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 좋은 학생을 뽑는 수단이다. 전국의 이렇다 할 대학에서 출제하는 논술고사 시험문제를 자세히 읽어 보시라.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대학교수들을 무작위로 뽑아 그 시험을 보게 하면 그들은 과연 몇 점이나 받을 수 있을까. 내가 가끔 시험감독을 하면서 문제를 읽어 보면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난해한 문제들이다. 문제는 그렇게 어려운 논술고사를 통과하고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의 문장능력이다. 학생들이 쓰는 글을 자세히 뜯어 보면 심각하다는 생각이 든다. 글쓰기의 기본이 안 된 학생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