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적된 역사 속을 유영할 수 있는 이탈리아 로마. 그러나, 내게는 '닥쳐온 육체적 고통' 탓에 두려움의 기억을 남긴 도시로 남아있다.
서지은
2011년 초가을. 한국의 가을 하늘빛을 닮은 청옥빛 바다가 일렁이는 이탈리아 나폴리.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한 병원. 예기치 않게 찾아온 키 큰 동양인 하나 때문에 응급실이 시끌벅적해졌다.
그 동양인이 사용하는 서툰 영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콧수염 멋진 나이 지긋한 의사. 비스킷처럼 똑똑 부러지는 이탈리아어로 간호사를 불러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의사를 데려오라 했다.
10분쯤 지났을까. 흑진주처럼 검은 머리칼에 다갈색 눈동자가 매혹적인 젊은 여자 의사가 그 동양인 앞에 섰다. 이어지는 질문.
"눈이 갑자기 나빠졌다고? 어떻게? 혹시, 마약했니?" "한 2주쯤 됐다. 오른쪽 눈 시력이 급속히 저하됐다. 푸른색과 초록색의 구별이 힘들다. 마약은 하지 않았다. 위스키와 와인은 많이 마셨다." 질문은 다시 이어졌다.
"너 어디서 왔는데? 몇 살이야? 이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니? 여권은 가지고 있지?" "제발 하나씩 물어다오. 나 영어 잘 못해". 캐틀링 기관총처럼 쏘아대는 빠른 이탈리아식 영어 발음에 그 동양인은 반쯤 혼이 나가 버렸다.
이러다 장님이 되면 어쩌나... 돌아올 짐을 꾸리다그날, 바로 그 '동양인'인 나는 40년을 살아온 한국에서도 해보지 않았던 CT(컴퓨터 단층촬영)를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경험했다. 젊은 여의사가 내 눈을 뒤집어 까고, 무릎이 고무망치에 제대로 반응하는지 체크하고, 등과 배에 청진기를 가져다 대고….
여하간 2시간 넘게 난리를 친 후에야 1차 검진결과가 나왔다. "뇌에는 문제가 없으며, 반응신경에도 별다른 이상소견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안과 검사를 해봐야 하는데 우리 병원엔 안과가 없다. 소견서를 써줄 테니 근처에 있는 안과를 찾아가서 2차 검사를 받아보라"는 게 나폴리의 예쁜 여의사가 내게 전한 검진 결과의 요지.
이탈리아 미녀 의사의 하얀 가운에서 풍겨오던 향긋한(?) 크레졸 냄새가 갑자기 짜증으로 바뀌었다.
'이러다 실명하면 어쩌지'라는 극단의 공포가 밀려왔다. '할 수 없구나. 돌아가자'라는 푸념이 머릿속에서 이어진 게 다음 수순. 아무런 계획 없이 한국을 떠나 아시아와 중동, 유럽을 떠돈 지 10개월이 지나던 무렵이었다.
장님이 되더라도 말이 통하는 곳에서 제대로 된 진찰이나 한 번 받아보자는 소박하고도, 절박한 심경. 이후 로마에 며칠 머물면서 귀국 항공권을 예약하고, 카타르의 도하를 거쳐 엄마가 사는 경상남도 마산까지의 리턴 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