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갈못. 연꽃이 지고난 뒤의 풍경이다.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남방 최대의 호수"였던 공갈못은 차차 줄어들어 지금은 4460평 정도로 작아졌다.
정만진
고려 충숙왕 원년(1314), 경주와 상주의 첫 글자를 따서 '경상도'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그만큼 상주가 컸다는 뜻이다.
물론 상주가 고려 시대에 들어 갑자기 확대된 것은 아니다. 신문왕 5년(685) 전국의 지방행정을 9주 5소경으로 개편할 때에 이미 양주(양산), 강주(진주), 웅주(공주), 전주, 무주(광주), 한주(경기도 광주), 삭주(춘천), 명주(강릉)와 더불어 9주의 한 자리를 차지할 정도였으므로 상주는 전통 깊은 거대 고도(古都)였다.
이곳은 사벌국의 영토였다. 사벌국은 신라 점해왕 때인 249년에 신라에 병합되었다. 그 후 법흥왕 12년(525)에 사벌주(沙伐州)가 되었는데, 그때도 상주는 변주(창녕), 한산주(경주), 실직주(삼척) 등과 더불어 5주의 한 곳이었다.
사벌국 고토 상주, 신라 때에도 주요 거점이었다고려 말까지는 경상도 감영(요즘의 도청)이 경주에 있었다. 태조(이성계)는 즉위 첫 해인 1392년 상주목(尙州牧)에 설치했고, 그 이후 상주목사가 경상감사(도지사)를 겸직했다. 당시 상주 관할의 경상도는 오늘날의 경북만이 아니라 부산, 대구, 울산, 경남 모두였으니, 이는 상주의 당시 위상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증거라 하겠다.
따라서 교통의 요지이자 너른 들판이 있는 상주에 예로부터 큰 못이 존재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기 42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령(古寧)가야 때에 축조된 공검지가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