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봄 도서관' 맨 아래층이 이원수문학관이다. 사진의 아래 부분은 이원수문학관의 현관을 덧붙인 것입니다.
정만진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평산로 135번지 32에 있는 도서관은 이름이 특이하다. '고향의 봄 도서관'이다. 국립중앙도서관, 대구동부도서관 식의 이름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낯선 이름 붙이기이다.
하지만 그 이름이 전혀 낯설지가 않다. 도서관 현판을 보는 바로 그 순간 누구든지, 애국가보다도 더 많이 불린다는 이원수의 동시 <고향의 봄>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창원이 이원수의 고향인가? 그는 본래 경남 양산읍 북정리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날짜는 1912년 1월 5일(음력으로는 1911년 11월 17일). 그러나 생후 10개월만에 창원읍 중동리 100번지로 이사했고, 거기서 10여 년을 살았다. 마산 오동동으로 옮겨가 살게 되는 것은 1922년의 일이고, 마산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1926년 방정환이 발행하던 <어린이> 4월호에 <고향의 봄>을 발표했다. 그의 나이 불과 15세 때의 일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고향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냇가의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창원에 '고향의 봄 도서관'이 세워지고, 도서관 안에 '이원수 문학관'이 마련된 것은 <고향의 봄>의 무대가 바로 창원이기 때문이다. 태어난 곳은 양산이지만 생후 10개월만 그곳에 머물렀기에 정신적 고향으로 볼 수 없고, 그때 본 주위 산들의 풍경을 이원수가 기억해내어 노래했을 리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원수 본인도 글을 통해 '내가 자란 고향은 경남 창원읍이다. (중략) 그러나 내가 난 곳은 양산이라고 했다. 양산서 나긴 했지만 1년도 못 되어 곧 창원으로 이사를 왔기 때문에 나는 내가 난 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창원읍에서 자라며 나는 동문 밖에서 좀 떨어져 있는 소답리라는 마을의 서당에 다녔다. 소답리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읍내에서도 볼 수 없는 오래 되고 큰 기와집의 부잣집들이 있었다. (이원수는 창원에서 아홉 살까지 살고, 진영에서 한 해 산 다음, 열 살 때 마산으로 이사를 와서 학교에 다니게 된다. 이 부분 중략) 마산은 바다와 산이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마산에 비해서는 작고 초라한 창원의 성문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았다'고 회상하고 있다. 요약하면 <고향의 봄>의 무대가 창원이라는 이야기이다.
이원수문학관 홈페이지부터 사전 답사를 해보니창원으로 가서 이원수문학관을 보고 싶다. 하지만 답사를 하기 전에 사전 준비를 충실하게 해야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책을 읽거나, 적어도 홈페이지가 있는 곳이면 그곳부터 사전 답사를 해야 한다. 그것도 어렵다면 인터넷 검색이라도 좀 해보고 떠나야 한다.
'이원수문학관'의 홈페이지를 보다가 깜짝 놀란다. 그의 경력을 소개하는 부분에 '1942년 <지원병을 보내며> 등 친일 작품 발표'라는 대목이 실려 있다. 이런저런 유명 인사들의 생가 등을 찾았을 때 단 한 번도 안내판에서 본 적이 없는 사실 그대로의 경력 소개가 낯이 설 지경이다. 게다가 그가 쓴 대표적 친일 작품 <지원병을 보내며>는 전문이 올라 있다.
지원병 형님들이 떠나는 날은
거리마다 국기가 펄럭거리고 소리높이 군가가 울렸습니다.정거장, 밀리는 사람들 틈에서 손 붙여 경례하며 차에 오르는 씩씩한 그 얼굴, 웃는 그 얼굴움직이는 기차에 기를 흔들어 허리 굽은 할머니도 기를 흔들어 "반자이" 소리는 하늘에 찼네나라를 위하여 목숨 내놓고 전장으로 가시려는 형님들이여 부디부디 큰 공을 세워주시오우리도 자라서, 어서 자라서 소원의 군인이 되겠습니다.굳센 일본 병정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