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의 밤
Dustin Burnett
싱가포르는 완벽한 도시였다. 부유한 경제와 깨끗한 도시 환경, 잘 차려놓은 박물관과 쇼핑 시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싸고 맛있는 길거리 음식. 거기에 말레이시아 못지않은 다민족, 다종교 사람들이 빚어내는 문화적 독특함. 하지만 이런 완벽한 곳에서도 우리에게 닥쳐오는 복병이란 항상 존재했으니 그것은 다시 한 번, 빌어먹을 '설 연휴'였다. 싱가포르는 인구의 80%가 중국계인 나라로, 설 연휴에서 벗어나고자 도망쳐 나온 말레이시아와 다름없는 곳이었다. 독 안에 든 쥐가 된 기분이다.
연휴 덕에 도시 대부분의 상점과 레스토랑이 문을 닫은 탓에 갈 곳이 없었다. 다행히, 박물관은 모두 열었다. 싱가포르에서는 주말과 공휴일 그리고 평일 6시 이후에는 국립 박물관의 문을 무료로 연다. 싱가포르 국립 미술관에는 마침 반 고흐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온갖 계획은 말아 먹었어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렇게 횡재를 하는 것이 인생인 건가. 어쩌면 여행을, 인생을 계획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전전긍긍하지 말고, 반드시 멋진 여행이 돼야 한다고 초조해하지 말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불안해하지 말고. 바람이 이끄는 대로, 발길이 닿는 대로.
그러다 보면, 말레이시아까지 와서 갈 곳 없는 팔자가 될 수도 있고, 모기떼의 공격을 받게 될 때도 있을 것이며, 또 언제는 우연히 들어온 미술관에서 반 고흐의 걸작과 느닷없이 조우하기도 하는 것이겠지. 나는 나의 행운에 감사하며, 아주 오랫동안, 화가가 화폭에 담아 놓은 진한 붓 터치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