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정의 용두레우물. 우물 앞 기념비에는 이곳이 용정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고 적혀 있다.
정만진
"독립 전엔 내 유골, 고향 보내지 마라"윤동주의 가족도 함경도에서 두만강을 건너 이주한 이향민들이었다. 이주 초기 간도 이주민들이 가장 먼저 집단적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곳은 용정. 많은 독립군들의 유적과 윤동주의 자취가 뚜렷해 한국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바로 그 소도시이다.
용정이라는 이름에는 용의 기운이 서려 있다. 지명 자체가 용우물 아닌가. 먹을 물을 마련하기 위해 이향민들은 거주지 일원 중심부에 깊은 우물을 팠고, 그 우물에 용두레우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따라서 용정, 용두레우물 등은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용을 좋아하고, 또 섬겨온 결과물인 셈이다.
우리 민족은 고장마다 그럴 듯한 못에 용소, 용연 등의 이름을 붙인 뒤 그곳이 용의 거주지라 믿었다. 당연히 무수한 사람들이 용꿈을 꾸었다. 고려 창업주의 이름에 '건(建)'이 들어간 것 또한 서해 용왕이 그의 할아버지 작제건에게 "너희 집안에 왕이 태어나도록 하려면 삼대에 걸쳐 이름에 '건'자를 넣도록 하라"고 가르쳐준 데 기인한다.
용 좋아하는 우리 민족, 간도에 마을 형성하고 '용정'이라 이름 붙여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용정 등 만주 일대를 공연단이 즐겨찾은 것이야 당연한 일이다. 1930년대 당대의 가수 고복수도 용정에 공연을 갔다. 막간에 잠깐 휴식을 즐기고 있는 그에게 낯선 30대 부인이 찾아왔다. 그녀는 자신의 고향이 부산이라며 집 주소를 고복수에게 주었다. 조선으로 돌아가거든 자신의 가족에게 안부를 좀 전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여인은 10년 전 남편을 따라 이곳으로 이주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남편은 죽고, 고향으로 돌아갈 차비도 없는 처지가 되었노라고 탄식했다. 고복수의 용정 공연이 끝나기도 전에 여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고복수는 작사가 김능인에게 이 안타까운 사연을 전했다.
타향살이 몇 해련가 손꼽아 헤여 보니고향 떠나 십여 년에 청춘만 늙고부평 갓흔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맥혀서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고향 압해 버드나무 올봄도 푸르렷만호들기를 꺽거 불든 그때는 옛날타향살이 정이 들면 내 고향 되는 것을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김능인의 이야기를 들은 손목인은 바로 그 자리에서 노랫말에 음률을 붙였다. 그렇게 탄생한 노래가 바로 그 유명한 <타향살이>. <타향살이>는 만주로 옮겨와 타향살이를 하고 있던 조선인들의 심경을 찢었다. 용정, 하얼빈 등지의 공연 때마다 노래를 부르는 이도 듣는 이도 눈물을 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