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알라룸푸르 회교도 성당
이수지
결국 사물함 공간의 반 이상을 빈 채로 남겨두고 7kg 무게의 배낭을 걸친 미련한 더스틴과 함께 시내로 나왔다. 일단은 돈이 필요했다. 지난 1개월간 분명 뭘 준비 한다고 한 것 같은데 정작 말레이시아 돈 한 푼 손에 안 쥐어져 있는 걸 보니 헛짓만 했나보다. 다행히도 은행은 가까웠다. 야자수 나무가 늘어선거리를 지나 은행에 도착했다. 휴일이라 그런지 건물 안은 한산했다.
"조심해! 우리가 돈을 얼마나 뽑는지 유심히 보고 있다가 누가 훔쳐갈지도 몰라. 복대에 재빨리 넣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놨어?""아 정말. 아무도 없는데 누가 본다 그래."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고." 더스틴은 자신의 그런 행동이 주위의 이목을 더 끌지도 모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지 이글거리는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복대에 돈을 두둑히 넣은 우리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쿠알라룸푸르 구경이고 뭐고 너무 피곤했다. 일단 밥을 먹고 조금 쉬기 위해 쿠알라룸푸르 타워로 향했다.
거리에는 함께 출장을 온 것 같아 보이는 한국인 가족이 야자수 앞에서 한가로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는 인간의 최소 욕구인 의식주 하나 해결 못해 더럽고 피곤하고 배고픈 기구한 팔자인데, 짧게 휴가를 온 사람들은 여가라는 고급스러운 욕구를 충족하며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휴가와 여행은 이렇게 다른 건가. 떠나기 전 친구가 했던 한 마디가 생각난다. 장기여행은 이수지 같은 사람이나 가지, 자기는 그런 고생스러운 건 돈을 준다고 해도 안 가겠다고.
그토록 설렜던 여행 첫날, 온통 쉬고 싶은 생각 뿐쿠알라룸푸르 타워에서 우리가 선택한 레스토랑은 고작, 푸드코트였다. 천근만근한 가방을 던져버리고 메뉴를 고르러 갔다. 그래도 우리의 긴 여행에서 먹는 첫 끼니니까, 메뉴도 고심해서 골라야지. 푸드코트를 세 바퀴 정도 돈 후 새빨간 카레 누들과 하얀 밥 옆에 반찬이 올려져 있는 메뉴를 골랐다. 낮에 출발해 다음날 낮에 도착하는 비행기를 타는 바람에 근 24시간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우리는 피곤함에 쩔어 있었지만 배도 고픈 탓에 앞에 놓인 음식에 감사하며 젓가락을 들었다.
'맛없다.'울고싶었다. 푸드코트 음식이 맛이 있을리야 없지만, 여행 첫 끼니부터 실패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기, 조금 맛이 없는 것 같지?'라고 더스틴에게 조심스럽게 말해 보고도 싶었지만, 그 말을 내뱉는 동시에 음식이 맛이 없다는 사실은 확실시 되고, 우리 여행의 첫날은 실패했다는 낙인이 찍힐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