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사람이야기전 두 번째 주인공인 대중음악평론가 강헌씨
재미있는재단
재미있는 재단과 <오마이뉴스>가 함께하는 '재미있는 사람이야기전' 두 번째 시간은 대중음악 평론가이자 한국대중음악연구소장인 강헌씨의 전시회였다.
강헌씨는 최근 <나는 가수다>와 <불후의 명곡> 등으로 대중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온 만큼 한국 대중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하게 했다. 그러나 이날(16일)의 '강헌전'은 우리의 상상을 보기 좋게 비껴간 '감동'의 힐링 콘서트였다.
강씨는 다른 대중음악평론가와 달리 정규 음악대학원을 마쳤다. 이날 전시회의 말미에 얘기 했던 자신의 이력에 대한 짧은 소개에서 그는 소설가가 되고 싶어 국문과를 갔지만 '소설가는 국문과에 오는 것이 아니다'는 말을 실감했단다. 그리고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발판으로 음악대학원에 진학했지만, 자신의 기대가 허상이라는 것만을 확인하고 마쳤단다.
그리고 시작한 것이 영화였단다. 좀 뜬금이 없지만, '친구 따라 강남 간' 케이스라고. 독립영화계에 발을 디딘 그는 90년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파업전야> <닫힌 교문을 열며> 등을 제작한 '장산곶매'의 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문제'는 냉혹했고, 마침내 그는 평생의 직업이 된 대중음악의 길로 접어든다. 그때 첫 일이었던, 대중음악 잡지의 기자로 출발할 때 당연하게 받은 질문은 '누구를 좋아하세요?'였단다.
그 질문에 강헌씨는 "베토벤을 좋아합니다"라고 답했고, 오늘의 '사람이야기 강헌전' 역시 예상 밖의 화두인, 베토벤의 이야기로 시작됐다.
"인류 최초의 로커, 공화주의자, 시민사회의 첫 번째 시민음악가가 베토벤입니다."강헌씨는 베토벤을 치열한 자기 혁신의 혁명가이자, 최초의 위대한 민중음악가로 규정했다. 강헌씨를 통해 듣는 베토벤은 새로운 대지의 경험이었다. 젊은 베토벤은 정규직(?)인 빈의 궁정음악가가 되고 싶었다. 베토벤은 평생 정규직으로의 전환을 꿈꾸었단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음악감독조차 하지 못하고 삶을 마친다. 빈은 그에게 평생 혹독한 도시였다.
강헌, 그가 베토벤 이야기를 꺼낸 이유복잡한 혈통을 지녔던 베토벤은 검은 얼굴, 땅딸한 키, 천연두로 인한 곰보자국을 가져 지독한 외모 콤플렉스를 안고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이는 그에게 당연하게도 싸울 수밖에 없는 일생을 부여하기도 했지만, 항상 성공에 대한 집착 역시 갖게 했다고 한다.
"주체할 수 없는 민중에 열정, 그러나 겉으로 드러내고 싸울 수는 없었던 현실, 넘을 수 없는 외모 콤플렉스, 베토벤은 스스로와 끝없는 싸움에 접어듭니다."베토벤은 가난했다. 지금 대다수의 음악인들처럼, 농민, 노동자들이 모이는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베토벤의 음악세계는 만들어져 간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작곡을 하고, 오후엔 산책을 한 후 선술집에서 서민들과 어울려 술을 마신 뒤 잠드는 지독히 단순한, 그러나 지독히 치열한 평생을 보냈다고 한다. 당연히 베토벤의 음악은 당대의 주류음악인 궁중음악과 달리 귀족들의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고 강헌씨는 평가했다. 그리고 베토벤 음악에 대한 강헌씨의 평가가 이어졌다.
"베토벤은 3번 영웅교향곡의 출판 직전까지 나폴레옹에게의 헌정이란 것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황제가 된 나폴레옹의 후원이 필요했지, 혁명의 영웅에게 바치는 헌정은 최소한 그 다음이었습니다."3번 영웅 교향곡은 위대한 음악가의 탄생을 알리는 장중한 신호탄이었다. 신호탄치고는 지나치게 '파괴적'이었다. 결과적으로 1789 프랑스 혁명에서 영향을 받은 공화주의자 베토벤은 혁명적 '영웅'을 민중들에게 선사한 것이다. 베토벤의 음악에 대한 자신의 전쟁은 그 이후 수많은 작품들로 현실이 된다. 이어진 5번 운명 교향곡의 3악장은 콘트라베이스로 시작하고 트럼본이 곁들여지는데 당시엔 잘 다루지 않는 강한 음과 거슬리는 저음을 내는 악기를 사용한 것이다. '인류 최초의 로커'로서 기존 주류음악을 깨는 시도를 감행한 것이다.
빈의 지배엘리트들은 베토벤의 음악이 거칠고, 우악스럽고, 시끄럽고, 제멋대로라며 경시했지만 그건 바로 베토벤의 음악이 '민중적'이었기 때문에 두려웠던 것이다. 실제로 농민들은 봉기할 때 베토벤의 음악에 가사를 붙여 투쟁의 현장에서 불렀다고 한다.
베토벤은 정치적, 사회적 공화주의자로서 실천적 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는 1% 특권층, 정규직을 꿈꿨었지만 그들에게서는 버림받고, 99%의 민중들이 그를 전설로 남게 해주었던 것이다. 좌절한 그의 유일한 안식처인 지저분한 선술집의 농민, 도시노동자, 창녀들이 그에게 인간의 비극적 상황, 익살, 생존본능, 좌절, 번민, 고뇌, 갈등이라는 소재를 던져주었기에 베토벤은 '인생의 용광로'에서 자신을 태워 위대한 민중의 음악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음악에서도 약탈의 시대를 살고 있는 한국 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