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나라의 문자인 갑골문자. 중국 북경(베이징)의 군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신이 인간을 매개로 자신의 뜻을 표현하는 것을 신탁(神託)이라 한다. 무정왕의 발언은 '내가 받은 신탁에 따라 총리를 선발하여 신의 뜻을 성취시키겠다'고 선포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기존 조정의 실세들을 배척하고 자기 소신대로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신탁의 논리를 내세운 것이다.
성경 다니엘서 2장에 따르면, 당대 세계 최강인 바빌로니아 왕국의 느부갓네살 왕(네부카드네자르 왕)은 신비한 꿈을 꾼 뒤, 이스라엘 출신 예언자인 다니엘의 도움을 빌려 꿈을 풀이하고 이를 통해 장래의 세계정세를 예측했다.
이렇게,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았던 고대에는 왕들이 제사장·종교인·점쟁이·무속인의 자문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는 예가 많았다. 무정왕의 행위도 동일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신탁에 따라 총리를 선발하겠다는 무정왕의 계획은 기득권층의 반발을 초래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에는 기득권층과 관계없는 의외의 인물이 총리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사회일지라도, 기득권층은 자기 집단의 이익을 침해하는 신탁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보이기 마련이다.
조정 밖으로 눈 돌린 무정왕의 '총리 찾아 삼만 리'하지만, 무정왕은 계획을 강행했다. <서경> '열명' 편에 따르면, 그는 꿈에서 본 인상착의를 토대로 몽타주를 제작했다. <사기> '은나라 본기'에 의하면, 그는 조정 대신들의 얼굴과 몽타주를 일일이 대조해 보았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그런 인물을 찾을 수 없었다.
이제, 무정왕은 조정 밖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인재를 구하기 위해 기득권층이 아닌 새로운 사람들을 찾았다. 몽타주를 전국 방방곡곡에 배포한 것이다. '총리 찾아 삼만 리'였던 것이다.
결국 몽타주 속의 인상착의와 일치하는 인물을 찾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주인공은 부열이란 사람이었다. 그는 노역장에 근무하는 일꾼이었다. 당시의 노역장에는 주로 죄수나 노비가 근무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지위가 매우 낮았음을 알 수 있다.
무정왕은 부열을 곧바로 기용하지 않았다. 꿈에서 본 인물과 인상착의는 동일하지만, 노역장에서 데려온 인물인지라 얼른 믿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무정왕은 인사검증에 착수했다. <사기> '은나라 본기'에서는 "(무정왕이) 그와 대화를 나눠보았다"고 했다.
그제야 무정왕은 무열이 대단한 인재라는 확신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를 재상으로 추대했고, 그 성과는 훌륭했다. "은나라가 잘 다스려졌다"고 '은나라 본기'는 말한다. 기득권층을 배제하고 신탁을 내세워 새로운 정부를 구성한 무정왕은 부열이란 인재를 얻어 나라를 강화시키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