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일본 무사들. 사카모토 료마가 죽은 지 2년 뒤인 1869년에 찍은 사진이다. 맨 왼쪽은 이토 히로부미. <현대 일본의 역사> 속 자료사진.
이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다. 막부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각계각층에 허겁지겁 자문을 구하는 과정에서 막부의 권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개혁 세력은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 막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개혁 세력이 구심점으로 내세운 존재는, 1185년경 가마쿠라 막부의 출현 이래 명목상의 군주에 불과했던 일왕(소위 '천황')이었다. 전국적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으면서도 정치적 실권은 거의 없는 일왕이란 존재는, 막부에 대항하는 개혁 세력이 볼 때는 안성맞춤의 파트너였다. 개혁 세력이 왕정복고를 주장한 것은 일왕에게 실권을 돌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막부 지도자인 쇼군에게 맞설 전국적이고 상징적인 인물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에드워드 카는 "한 시대의 문명 발전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집단은 다음 시대에는 그런 역할을 수행하기 힘들다"며 "그런 집단은 이전 시대의 전통·이해관계·이념에 너무 깊이 젖은 탓에 다음 시대의 요구나 조건에 적응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말처럼, 개혁세력의 전면에 나선 것은 봉건 제후인 다이묘나 막부의 고위층 인사들이 아니었다. 개혁세력의 주역은 하급 무사들이었다. 사회를 움직일 역량이 있으면서도 구체제의 이해관계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운 그들이 시대의 변혁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반나절 만에 개화파로 변신한 쇄국파이 시대에 활약한 수많은 하급 무사 중에서, 특히 사카모토 료마가 주목을 받는 것은 그의 업적은 물론이고 그의 특성 때문이다. 그는 통찰력·협상력·돌파력 외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특성을 더 보유했다. 이 글에서는 그 두 가지에 대해서만 설명하고자 한다.
두 가지 중 하나는 '신속한 변화'다. 사카모토 료마는 당시의 일반적인 무사들과 마찬가지로 서양에 대한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전쟁이 나면 외국인의 목을 따서 돌아갈 생각"이라고 결의를 밝힌 적이 있다.
그런데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극적 장면이 연출됐다. 쇄국파가 반나절 만에 개화파로 변신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신속한 변화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사카모토 료마가 28세였던 1862년, 그는 칼을 들고 막부 관료의 집에 침투했다. 미일 수호통상조약 비준서를 소지한 사절단을 태운 선박을 이끌고 1860년에 일본 최초로 태평양을 횡단한 가쓰 가이슈의 집이었다. 가쓰 가이슈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개화파였다. 사카모토 료마는 개화파를 처단할 목적으로 침투한 것이다.
칼을 뽑은 사카모토 료마는 "일단 내 말 좀 들어보라"는 가쓰 가이슈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그런 뒤,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칼을 바닥에 놓고, 오후 내내 개화의 필요성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이를 계기로 가쓰 가이슈는 사카모토 료마의 스승이 됐고, 개화파로 전환된 사카모토 료마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개화운동에 앞장섰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에 도달하자, 기존의 생각을 가차 없이 내던진 것이다. 그의 변화는 다른 무사들의 의식에 영향을 주고, 나아가 일본의 근대화에 영향을 미쳤다.
'통합의 귀재'가 맞은 극적인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