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가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MBC 스튜디오에서 중앙선관위 주최로 열린 여야 대선후보 첫 TV토론에서 답변 준비를 하고 있다.
남소연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 박 후보가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에게서 받은 6억 원에 대해 김 위원장은 '소녀 가장이 받은 돈'이라 두둔했다. (6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그분(박근혜)이 정말 아버지, 어머니를 비명에 잃으시고 동생들을 데리고 길바닥에 나 앉은 거예요. 그때 소년소녀가장이었습니다." 김 위원장의 말은 "당시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도 그렇게 흉탄에 돌아가시고 나서 어린 동생들과 살 길이 막막한 상황이었다"고 한 박 후보 말의 연장선상에 있다. '생계가 어려우니 돈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
그러나 사실관계를 대충만 따져봐도 김 위원장의 말은 최대한 박 후보에 유리하게 윤색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길바닥에 나 앉았다'고 할 상황이 아니다. 박근혜·근영 자매는 5·16 이전에 살던 서울 신당동 사저로 돌아갔다. 대지 99평에 건평 39평의 단층 기와집이다.
당시 박 후보는 27세, 동생 박근영(박서영으로 개명)은 25세, 막내 박지만은 21세였다. 3남매가 모두 성인이었고, 박근영은 서울대 음대를 졸업했고, 박지만은 등록금도 필요 없는 육군사관학교 생도였다. 이미 성인이 된 3남매를 소년소녀가장으로 부르는 경우는 없다.
한국 여성들의 나약함을 질타하는 김 위원장의 지론과, 재벌인 집안과의 관계도 끊긴 상태에서 밑바닥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기업을 일으킨 김 위원장의 인생역정을 감안하면, 박 후보가 6억 원을 덥석 받은 걸 옹호하고 나설 입장은 아니다. 김 위원장의 인생역정과는 정반대의 길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박 후보가 받은 돈은 노력의 대가가 아니었고, 1979년 청와대를 나온 박 후보는 18년 동안 스스로 생계를 개척하기는커녕 칩거하며 어떤 직업에도 종사하지 않았다.
'금고 속 6억 원' 정당화, 투명성 강조하는 기업인이 할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