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 묘소 여름
정만진
오늘도 다 새거다 호미 메고 가자스라
내 논 다 매여든 네 논 좀 매어 주마올길에 뽕 따다가 누에 먹여 보자스라사람의 착한 일에 빠뜨릴 수 없는 것이 효행이다. 그러나 돌아가신 뒤에 대단한 장례나 제사를 모시려고 하지 말라. 살아 계실 때에 실천해야 한다. 돌아가신 뒤에는 두 번 다시 효도를 실천할 수 없다. 그저 후회뿐이다. 박인로의 <조홍시가>가 잘 갈파해주듯이, 아무리 맛나 보이는 홍시라 할지라도 부모님이 이미 돌아가셨다면 집에 가져가봐야 어찌 효도를 할 수 있겠는가.
어버이 살아신 제 섬길 일란 다하여라지나간 후이면 애닯다 어이하랴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내용이 내용인 만큼 이 시조는 <훈민가> 중에서 가장 많이 교과서에 실렸다. 아래 시조도 종종 교과서에서 볼 수 있었던 작품이다.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나는 젊었거니 돌이라 무거울까늙기도 설워라커든 짐을조차 지실까 정철의 묘소는 왜 진천에 있을까정철은 전라남도 담양 사람이다. 그곳에서 20대까지 공부를 했고,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도 지었다. 그런데 묘소와 사당은 충북 진천에 있다. 김유신은 진천 태령산 아래에서 태어나 15세 정도까지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생가, 태실, 사당이 두루 진천에 있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정철은 진천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살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어째서 진천이 '정철 답사지'가 되었을까.
1593년에 타계한 정철은 경기도 고양시 원당면 신원리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산소 주변에 자꾸 물이 나왔다. 당시 진천현령으로 있던 후손 정양(鄭樣)이 고민을 거듭하다가 송시열에게 자문을 구했다. 송시열은 현재의 묘소 자리인 문백면 봉죽리 562번지를 '좋은 땅'으로 추천하면서 신도비의 글도 써 주었다. 1665년 지금의 자리로 이장된 묘소는 충청북도 기념물 106호로 지정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신도비와 정송강사도 모두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신도비는 유형문화재 187호, 묘소 이장 때 함께 옮겨졌다가 1979-1981년에 중건된 정송강사는 기념물 9호다. 정철 덕분이든 송시열 덕분이든 진천은 꽤 괜찮은 '관광 명소'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