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견대에서 바라본 대왕암
정만진
<삼국유사> 중 '문호왕 법민' 부분의 일부다. 화장 여부는 언급이 없고 곧장 '동해 가운데의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다'로 되어 있어 장례 장소만 분명하게 확인된다. 과연 문무왕의 장례 방식은 무엇이었으며, 대왕암은 무엇을 한 곳일까?
<삼국사기>는 이른바 '정사'다. 게다가 유교적 입장에서 집필되었다. 또 김부식은 신라 왕실의 후예로서, <삼국사기>를 신라 중심의 사관으로 집필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런 그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한 문무대왕의 장례를 기술하면서 '불교식으로 화장했다'고 기록했다. 문무왕의 장례는 매장이 아니라 화장으로 치러졌음이 분명하다는 말이다.
"내가 죽어서라도 왜구를 막으리라" 그런데 현대에 들면 대왕암에 대한 전문가들의 기록은 서로 판이하다. 먼저 한국문화유산답사회가 엮은 <답사여행의 길잡이 2 - 경주>의 해설을 보자. 대왕암이 수중(水中)왕릉이라는 주장은 역사왜곡을 통해 정권적 이익을 보려한 박정희 군사정부의 '부끄러운 일일 뿐'이라는 견해다.
대왕암은 가까이 다가가 보면 바위 한가운데가 못처럼 패어 있고 (중략) 못 안의 돌 밑에 문무왕의 유골 장치가 있다는 설도 있지만 이는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증명된 사실이 아니다. 다만 외곽을 둘러싼 바위 안쪽에 인위적으로 바위를 따낸 흔적이 있는 것으로 그렇게 추정할 따름이다. 만약 이 장치가 유골을 묻은 것이라면 세계에서도 드문 수중릉이 될 것이지만, 이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정권 안보에 이용하려 한 부끄러운 일일 뿐이다.
반면 박정희 정권의 수중왕릉론에 동조한 학자들은 '대왕의 장례는 전후 양차에 걸쳐서 육지와 해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서 '능지탑은 대왕의 화장터에 건립된 공양석탑이요 대왕암 또한 그의 유언을 정확히 따랐던 장골처(葬骨處)였으니 대왕암 내부의 구조는 곧 대왕 사후의 주처(住處)로서의 경영이었던 것'이라고 해설한다. 능지탑에서 화장을 한 후 대왕암에 와서 뼈를 묻었다는 주장이다.
화장을 했는데 뼈를 묻어? 화장을 했으면 당연히 뼛가루를 뿌려야지 무슨 재주로 뼈를 묻는단 말인가. 산골처(散骨處)를 어떻게 장골처라 할 수 있나. <삼국사기>에 나오는 화장 기록을 부인할 수는 없었던 박정희 정권, 그래서 구차한 논리를 개발한 모양이다.
대왕암을 보러 동해 바닷가로 떠나자<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도 읽었고, 서로 상반되는 양쪽의 주장도 충분히 들었으니 이제 동해로 떠날 때다. 경주 보문호에서 동쪽으로 잠깐 나아가다가 삼거리가 나오면 왼쪽으로 간다. 오른쪽은 불국사로 가는 길이다.
옛길이든 터널이든 추령 고개를 넘으면 다시 계곡 모양의 들판이 나타난다. 길은 오른쪽에 대종천을 낀 채 굽이굽이 동해로 이어진다. 많은 보물을 보유한 기림사, 인도 양식의 석굴 법당을 자랑하는 골굴암, 신라 최초의 쌍탑 감은사터 등을 왼쪽에 거느린 길이다. 그러므로 길의 모양상 그들은 돌아오는 길에 답사하는 것이 좋다.
문무왕은 재위 13년, 681년에 세상을 떠난다. 죽음을 눈앞에 둔 문무왕은 삼국통일은 이루었고 당나라도 몰아내었으니, 이제 남은 최대의 적은 왜구라고 판단했다. 이미 박혁거세 왕 때부터 신라를 괴롭혔던 왜구가 아닌가. 서기 14년인 남해왕 11년에 벌써 병선을 100여 척이나 보내어 바닷가 민가를 약탈했던 왜구들이다. 그 결과 감은사 바닷가에 대왕암이 태어났다. 죽어서라도 왜구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호국 의지는 대왕암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윽고 대왕암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바닷가에 선다. 여기서, 나라와 백성들을 한없이 사랑한 문무왕의 유언을 다시 한번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읽으면 읽을수록 감동을 주는 왕의 유언이다.
"(전략) 옛날에 나라를 다스렸던 영주도 결국 (죽고 나면) 한 무더기의 흙을 이루게 되고, 초동과 목동들은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게 된다. 여우와 토끼들은 무덤에 굴을 뚫고 살아간다. (커다란 무덤을 만들면) 한갓 재물만 낭비하고, (역사가들의) 서책에 비방만 남길 뿐이다. (거대 왕릉을 축조하면) 헛되이 백성들만 괴롭히고, 죽은 이의 넋도 구제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렇게 한다면) 나의 마음이 상하고 아픔은 끝이 없을 터이니 내가 좋아하는 바가 아니다. (중략) 내가 절명한 후 열흘이 지나거든 궁문밖 뜰에서 화장을 하라. (하략)"갈매기가 빙빙 공중을 맴도는 대왕암을 바라보면서 '죽고 나면 거대 무덤이 무슨 소용인가. 고된 노동으로 백성들만 고통스럽게 하고, 재물만 낭비하는 꼴이다. 그러므로 화장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문무왕의 장례를 떠올려본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모두 '큰 바위 위에[大石上, 大巖上] 장사지냈다'고 기록한 것을 연상한 결과다.
통일신라의 신하들이 대왕암 위[上]에서 뼛가루를 뿌리고 있다. 용이 되어 왜구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을 위해 대왕암 위에서 간략한 장의 행사를 열고 있다. 대왕 스스로 '상례를 절약하고 검소하게 치르라[喪制度務從儉約]'고 유언했으니 화장 뒤 이곳 대왕암에 올라 치르는 행사는 필연적으로 검약한 모습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해변 모래톱에서는 세차게 일렁이는 파도들도 대왕암 주변에서 아주 조그맣게 살랑이듯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