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연희동 사무실에서 만난 제윤경 에듀머니 대표
김시연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 채무자예요. 중산층 빚은 탐욕 때문이고 저소득층 빚은 무능 때문이라고 서로 갈등하는데 다 똑같이 당한 거예요. 범인은 따로 있어요."
지난 13일 '빚을 갚고 싶은 사람들(빚갚사)'이란 채무자 단체가 탄생했다. 그동안 '빚쟁이(채권자)' 서슬에 눌려 살던 '빚쟁이'(채무자)들이 가혹한 빚 독촉을 멈춰달라며 반기를 든 것이다.
그 중심에는 '가계 재무 주치의' 제윤경(41) 에듀머니 대표가 있다. 제윤경 대표는 때마침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장인 이헌욱 변호사와 함께 쓴 <약탈적 금융사회>(부키)란 책에서 금융회사들의 '묻지마 대출'과 비인간적인 채권추심 행태를 고발했다.
18일 오후 제 대표를 만난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에듀머니 사무실은 일반 단독주택이었다. 마당은 푸른 잔디로 덮여있고 강아지가 낯선 손님을 맞는 평화로운 풍경이다. '내 집 마련' 꿈에 등장할 법한 장면이지만 이런 환상 때문에 숱한 이들이 '하우스 푸어' 함정에서 빠지고 말았다.
"지금도 가끔 연락이 오고 선물을 보내주는 분들이 계세요. 그때 집 팔게 해 줘서 정말 고맙다고." 재테크 열풍이 한창이던 지난 2006년부터 제 대표는 저소득층과 중산층을 상대로 이른바 '빚테크'의 환상을 버리고 감당할 수 없는 금융상품이나 부동산은 처분하라고 조언했다. 집값과 주가가 덩달아 뛰던 당시 과감히 집을 처분했거나 '내 집 마련'을 포기했던 이들로선 제 대표가 고마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든 상담자들이 그 말을 따른 건 아니었다. 금융회사뿐 아니라 언론, 정부까지 가세한 '빚테크'의 유혹은 그만큼 강력했다.
가계부채 1000조 원, 하우스 푸어 150만 시대. 제 대표가 채무자 권익 보호에 나선 건 이 모든 책임을 채무자들에게만 돌리고 탈출구 없이 가혹한 채무 독촉마저 용인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생계형 대출로 가정 파탄 위기에 몰린 채무자들을 이대로 방치하다간 금융회사 역시 온전할 수 없다는 강력한 경고다.
"대부업체들 채권추심으로 눈 돌려... 협박전화 받기도"- 채무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 탓에 단체 결성이 쉽지 않았을 텐데."단체 활동을 돕겠다는 채무자들 전화는 많은데 생계가 힘들어 잘 나서지 못해요. 창피한 건 둘째고 시간 없다는 게 더 큰 문제에요. 당장 먹을거리부터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죠. 지금까지 채무자 30여 명이 회원으로 참여했고 도우미, 변호사들까지 합하면 80~90명인데 도우미들도 둘 중 하나는 채무자에요. 참여한 국회의원들 가운데도 사채를 쓰거나 주택담보대출 같은 빚이 있고요. 사실 신용카드도 엄밀히 빚이라고 보면 거의 모든 국민들이 채무자인 셈이죠(웃음)."
빚갚사 카페(cafe.daum.net/edufp) 게시판에는 지난주부터 채무자들의 절박한 사연이 줄을 잇고 있다. 현재 실업 상태인 한 20대 여성은 10년 전 사망한 부친 빚 4천만 원을 갑자기 떠안게 돼 절망에 빠진 사연을 올렸다. 다행히 그동안 법이 바뀌어 채무 사실을 안 날부터 3개월 이내에 상속 포기(한정승인)가 가능하다는 전문가 답변을 얻었지만 이처럼 뒤늦게 채무 독촉을 하는 사례가 최근 늘고 있다.
"10년 전 얻은 카드 채 때문에 연락이 오기도 해요. 금융권에서 오랫동안 방치하다 부실채권이 돼 채권추심업체로 넘어가면서 뒤늦게 회수에 나선 거죠. 요즘 대부업체들도 장사가 안 되다보니 채권추심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어요. 채권추심법 개정을 서둘러야 해요." 우리나라도 과다 채무자들을 위한 개인 워크아웃, 파산, 회생 같은 신용회복제도를 두고 있지만 그 조건이 지나치게 까다로워 유명무실한 상황이다. 또 대상이 신용불량자로 한정되다보니 이런 제도를 이용하려면 최소 3개월에서 1년 넘게 채무 독촉을 견뎌내야 하는 한계도 있다. 제 대표가 불법 채권추심 문제를 지적하자 협박 전화를 받기도 했다.
"방송에 나가 채무 독촉 전화를 반복적으로 하는 건 불법이라고 했더니 며칠 전 협박 전화가 왔어요. '악덕 채무자가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 우린 적법하게 한다'며 밤길 조심하라고 따지더라고요. 악덕 채권추심업자가 훨씬 더 많은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