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여자는 왜?>와 <페미니즘의 도전>
임승수
여성주의에 나오는 가사노동 분담이라는 개념은 결혼 전의 저에게는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추상적인 관념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의 저에게는 가사노동 분담이라는 추상적 관념이 '설거지, 세탁물 개기, 화장실 변기 청소하기, 막힌 하수구 뚫기, 진공청소기 돌리기' 등으로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아이까지 태어나 육아노동이 추가되니 상황은 점입가경이 되었습니다. 저는 영유아는 그냥 눈 깜짝할 사이에 어린이가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저의 4세 이전 어린 시절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이유로, 영유아 시절의 지난했던 삶을 전혀 알지 못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요, 제 똥오줌은 부모님이 치워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수유도 장난이 아니더군요. 이제 막 태어난 애들은 한동안 밤중에도 세 시간마다 깨서 젖을 달라고 우렁차게 울어댑니다. 밤중수유란 것이 있는 줄도 몰랐던 저는 크게 당황스러웠습니다. 육아노동 분담이라는 추상적 개념 역시 저에게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마누라와 번갈아 밤중수유를 하고 함께 아이 목욕을 시키며, 정말 부모님께 효도는 못할망정 불효는 하면 안 되겠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게다가 세상의 절반을 대변하는 우리 '마눌님'은 일찍이 <페미니즘의 도전>을 독파하시고 다수의 여성주의 서적들도 섭렵한 무시무시한 분이죠. 왜 저들이 국가보안법처럼 구시대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악법을 근거로 '불온서적' 운운하며 진보적인 내용의 책들을 그렇게 핍박하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우리 마누라가 <페미니즘의 도전>을 안 읽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저 자신이 여성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약간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쨌든 억지로라도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을 분담했습니다.
"설거지를 니가 도와주는 거냐? 설거지는 니 일이야!"그런데 저의 부실한 여성주의적 밑천이 한꺼번에 드러난 사건이 터졌지요. 어떻게 보면 별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저에게는 정말 나 자신을 다시 성찰하고 들여다보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강의 일정이 많이 잡혀서 피곤하고 정신이 없었던지라 설거지를 제때에 못해 많이 쌓여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연일 이어지는 강연일정으로 피곤했던 저는 소파에 누워서 피로를 풀며 빈둥거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은 그분의 성대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파형의 음파가 제 고막을 다음과 같이 때렸습니다.
"왜 설거지 안 하는데? 결국 내가 했잖아!"몸도 피곤한데 느닷없이 공격을 받으니 살짝 저항하고 싶어졌습니다. <여자는 왜?>를 읽은 자존심을 담아, 제 성대에서 상대적으로 저음이 강한 파형의 음파가 다음과 같이 튀어나왔습니다.
"요즘에 강연이 많았잖아! 피곤해서 그랬어. 솔직히 나만큼 집안일 잘 도와주는 남편이 어디 있냐? 내가 설거지 항상 도와주잖아."솔직히 아무리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을 분담한다 하더라도 제가 하는 일은 마누라가 하는 일에 비해서는 턱도 없이 부족한 수준입니다. 항상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지만, 그날따라 몸이 피곤해서인지 억눌러왔던 '진심(?)'이 나와 버렸습니다. 그때 부메랑처럼 돌아 온 마누라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설거지를 니가 도와주는 거냐? 설거지는 도와주는 게 아니라, 니 일이야!"완전 충격이었습니다.
'그렇구나! 설거지는 내가 마누라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그냥 내 일이었구나!'맞습니다. 결혼 후 함께 가사노동 분담에 대한 '대책회의'를 하면서 설거지는 제가 하기로 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저는 항상 설거지를 하면서도 무의식중에 나는 이렇게 마누라를 '도와주는' 착한 남편이고, 여성주의적 시각을 가진 훌륭한 사람이야, 라고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내가 좋은 일을 하고 봉사를 한다는 생각으로 설거지를 하니, 결국 몸이 힘들고 정신적으로 피곤한 상황이 되자 더 이상 좋은 일과 봉사를 꺼리게 된 것이죠. 설거지는 제가 해야 하는 일, 즉 저의 의무가 아닌 것이니까요.
가사와 육아는 부부 모두에게 의무... 마누라한테 '빚진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