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이 축조했다고 전하는 궁남지(부여). 궁남지 일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공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부여시는 연못 일대를 '서동공원'으로 꾸며놓았다.
정만진
무왕의 무덤을 대왕릉, 선화공주의 무덤을 소왕릉이라 부른다. 선화공주는 왕이 아닌데도 그렇게 부르는 까닭이 궁금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안내판도 아무 말이 없다. 아마도 무덤을 만들었을 당시에는 왕릉과 왕비릉이었지만, 세월이 흘러 주인을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크고 작은 것을 기준으로 그렇게들 부르게 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하지만 왕릉이 왕비릉보다 조금 더 큰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일이다.
둘은 200m가량 떨어져 있다. '세기의 연애' 정도도 아니고,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평강공주와 온달 연애 사건과 더불어 우리나라 역사상 '한반도 3대 연애'의 주인공인 두 사람이 죽은 뒤 그렇게 떨어져 있는 것이 의아하다. 금관가야 개국시조 수로왕과 허황옥이 합장되지 않고 따로 묻혀 있듯이, 무왕과 선화공주도 그렇게 각각 누워 있다. 두 사람은 합장을 유언했을까.
무덤을 만드는 일은 자손들의 몫이다. 무왕의 장남인 의자왕 등 선화공주 부부의 후손들은 부모의 무덤을 합장하지 않았다. 전설 같은 결혼담을 남긴 두 사람의 생애로 미뤄볼 때 분명히 합장 유언이 있었을 법도 한데, 결과는 그 반대였다. 왜 그랬을까. 글을 쓰면서 나는, 대왕릉과 소왕릉 사이의 200m야말로 신라와 백제의 정치적 거리가 아닐까, 상상해본다.
두 사람의 사랑은 민중들에게는 최고의 연애였지만, 무왕이 죽은 해 8월에 의자왕이 김춘추의 사위와 딸을 죽이는 것을 보면, 양국 정치 지도자들에게는 합장의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다는 추측이다.
만약, 나에게 무왕과 선화공주의 무덤을 만드는 권한이 주어진다면? 합장하지 않고 따로 모실 것이다. 사랑은 '저만치' 떨어져 있을 때 더욱 애타는 법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으면서 영원히 서로 그리워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두 사람 모두 한결같이 행복하시기를!
덧붙이는 글 | TNT뉴스에도 송고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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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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