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중인 필자
신은미
화려한 한복을 멋지게 입은 사회자가 내 차례를 소개한다. 살짝 객석을 내다보니 빈자리 없이 꽉 차 있다. 마음이 어느새 벅찬 감격으로 흥분된다.
드디어 나는 무대의 중앙에 섰고, 화려한 불빛 조명을 받았다. 박혜영 선생의 감미로운 전주곡이 시작된다. 마치 심사위원처럼 심각하게 앉아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관객들 사이에 작은 파장이 인 듯하다. 앞서 연주한 사람들 모두가 서양음악을 연주했는데, 내 차례가 되고 북한 노래가 흘러나오니 전주서부터 벌써 관객들은 감흥을 느낀 듯하다.
민족이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나의 소망이 노래를 통해 저들의 마음으로 흘러들어 감을 느낀다. 저들은 한 소절, 한 박자도 놓침이 없이 내 마음을 꼭 안아 준다. 어느새 내 영혼도 동포들과 하나가 돼 그들의 마음속에 머무르고 있음을 느낀다. 관객석 여기저기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모습들이 보인다. 나 또한 눈물을 떨군다. 목이 메이면서도 노래는 저들과 나를 이어주고 있다.
문득 지난해 10월, 눈물의 연속이었던 첫 북한 여행 당시가 떠올랐다. 그런데 이 공연마저도 아직 그 연장선 상에 있는 모양이다.
"재청! 재청! 재청!" 공연장에 울려 퍼지는 관객들의 목소리. '아! 내 생애 최고의 공연이구나. 음악을 공부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노래로 북녘 동포들과 한 마음을 이뤘으니...
헤어진 가족, 60년 만에 다시 만나다공연을 마치고 호텔 식당으로 들어섰다. 황연희 아가씨가 예쁜 미소로 우리를 반긴다.
"선생님 공연 잘 하셨습네까? 저도 꼭 보고 싶었는데... 아마 텔레비전으로 볼 수 있을 겁네다. 이런 귀중한 공연들은 방송국에서 녹화해 두고두고 보여줍네다."그리고 "제가 가족들과 친지들에게 '제가 접대하고 있는 분이 공연에 초대돼 오신 분들인데, 가서 공연을 보라'고 했습네다"라고 진심 어린 말을 건넨다. 따스한 미소 만큼이나 마음도 따뜻하다.
우리 식탁 건너편에는 애절해 보이는 여러 가족이 앉아 있다. 텔레비전에서 혹은 말로만 듣던 이산가족 상봉식이었다. 식탁에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음식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서로의 손을 붙잡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만 닦고 있다. 각자의 사연들을 담고 있는 이산가족들의 상봉 장면은 내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한 여인은 사업상 남쪽에 내려가 있는 남편을 찾아 뱃속의 아이와 두 딸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 가기로 결심한다. 그 여인의 엄마, 즉 아이들의 외할머니는 '곧 전쟁이 마무리될 덴데 홀몸도 아니고 두 아이를 데리고 가는 것은 무리니까 걸을 수 있는 여섯 살바기 큰딸만 데리고 가고, 두 살짜리 여자 아이는 내가 보살피마'라고 말씀하셨단다.
그 후 헤어져 살게 된 60여 년의 세월. 두살바기 여자 아이는 외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후 한 많은 세월을 살았단다. 무슨 말이 필요 하겠는가. 돌아가신 외할머니 또한 어린 손녀딸을 혼자 남겨 놓고 어떻게 눈을 감으셨을지... 그 심정, 미루어 가늠할 수 있었다.
지금은 너무나도 연로해 거동이 불편한 애기 엄마는 평생을 북쪽에 남겨놓고 온 딸 생각으로 살아도 살아 있음을 느끼지 못한 채 사셨단다. 마침내 이들 가족은 남겨 두고 온 딸을, 동생을, 누나를 한 번이라도 만나 볼 생각으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단다.
다행히도 애기 엄마는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 육십 노인이 돼 버린 두 살바기 어린 딸을 만날 수 있었단다. 지금은 거동이 불편해 엄마는 북한에 올 수 없다고. 여섯 살 언니와 뱃속 남동생이 엄마 대신 기회가 닿는 대로 북한을 방문한다고 한다. 그나마 엄마는 큰딸과 아들이라도 두 살바기 딸 아이를 만나보고 올 수 있으니 그 희망으로 남은 여생을 버티신단다.
"이산가족은 이 순간에도 고통 안고 죽어갑니다"아무리 자주 찾아와 본들 지난 60년의 그리움을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그저 일주일 내내 서로 붙잡고, 껴안고, 울고 또 울 뿐이다. 그래도 그들의 눈물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여섯 살바기 언니는 훌쩍 늙어버린 사위와 며느리를 데리고 온 두 살바기 동생이 못내 안쓰럽고 가여워 눈물을 닦아줄 힘마저 없어 보인다.
한편, 한 할아버지는 그 옆 테이블에 앉아 한 할머니와 60대로 보이는 남성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전쟁 때 헤어진 부인과 아들이란다. 부인은 남으로 간 남편이 언젠가는 꼭 돌아올 것이라 믿으며 아들을 키우며 일생을 혼자 살았단다.
이 이산가족들이 옆에서 함께 눈물을 닦고 있는 우리에게 한마디 한다.
"그래도 우리는 외국 시민권을 갖고 있어 헤어진 가족들을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쓰라린 고통을 안고 죽어 가는 남과 북의 이산가족들을 생각하면... 그분들께 너무나 죄송하고 미안합니다..."이런 비극이 세상 천지에 또 어디 있으랴. 피붙이를, 내 형제, 내 자매, 내 부모를 생이별하고 남북 두 나라가 너무나도 태연하게 존재하고 있으니... 끊어진 인연의 끈을 방치하고 있는 두 나라에 어떤 벌이 내려질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서늘해진다. 이 비극은 그 어떤 번드르르한 말로도, 그 어떤 이유로도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이 밤은 너무나도 길고, 또 슬프다. 미어지는 가슴을 추스르기 힘들어 창문을 연다. 하늘의 별빛이 희망의 속삭임으로 다가와 조금은 위안이 된다.
이틀 동안 재미동포 예술단은 같은 연주홀에서 두 번의 공연을 더 했다. 공연은 회를 거듭할수록 서로를 향하는 뜨거운 민족애와 하나 되기를 원하는 간절한 바람으로 채워졌다. 노래를 부르는 나도, 내 노래를 듣는 북한동포들도 마음에 드리우고 있던 잿빛 장막을 걷어 올리고 자유롭게 교감했다. 같은 언어, 같은 정서를 공유한다는 것이 이렇게 따스함으로, 친근함으로 다가올 줄이야. 몇십 년을 살아온 미국에서도 사람들로부터 이와 같은 친화력을 느껴보지 못했다. 분명 내 민족, 내 나라에서만 느껴 볼 수 있는 감정의 하모니였다.
김일성 주석 기리는 열병식... 정말 보고 싶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