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보경의 사랑을 외면하는 이훤(김수현 분).
MBC
조선 중기의 저명한 지식인인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자고로 순화시키기 힘든 것이 부인이다. 아무리 강심장일지라도 부인을 두려워하지 않을 남자가 몇이나 되겠는가?"라고 말했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남편한테 고분고분했을 것 같지만, 사료에서 확인되는 부부생활은 오늘날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어우야담>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이런 이야기가 유행했다. 십만 대군을 거느린 장군이 허허벌판에 붉은 기와 푸른 기를 꽂아두고는 "아내를 두려워하는 자들은 붉은 기로 가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푸른 기로 가라"고 명령했다.
9만 9999명은 붉은 기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런데 병사 하나가 저 혼자서 푸른 기 쪽으로 뛰어가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집안에서 당당하게 사는 남편 같았다. 장군이 궁금해서 전령을 보내 질문했다. 왜 여기 있느냐고. 병사 왈(曰), 집사람이 남자 셋 이상 모인 데는 가지 말라고 했거든요, 남자는 셋만 모이면 여자 이야기를 한다고요.
이런 이야기가 민간에서 널리 회자된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우리의 선입견과 달리 조선시대를 포함해서 과거 시대의 아내들도 남편 앞에서 상당히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다. 조선시대 문헌들에서 남편의 권위를 유독 강조한 것은 실제로는 남편의 권위가 그리 높지 않았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국가에 대한 충성의 의무가 유별나게 강조됐던 박정희·전두환 집권기에 실은 국가에 대한 저항이 엄청나게 거셌던 것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옛날 부인들의 지위가 그렇게 낮지 않았다면 애초부터 부인의 투기가 금지됐던 이유는 무엇일까? 고대 사회에서 투기죄를 처벌한 배경이 무엇인지를 조사해보면, 그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부여 편에 따르면 부여에서는 부인의 투기를 사형으로 처벌했다. 이것은 여성의 지위가 낮았기 때문이 아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여성의 지위가 꽤 높았다. 여성들이 국가의 제사사무를 주관한 사실에서도 그 점을 알 수 있다.
부여, '돌싱' 경제력 문제로 일부다처 허용부여에서 투기를 처벌한 것은 일부다처제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조카들을 책임지는 형사취수 제도가 있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부여에서는 한 남자가 여러 아내를 두는 것을 사회적으로 공인했다.
형이 형수를 맞이하는 것은 오늘날의 감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당시로는 그것이 일종의 사회복지를 위한 제도였다. 고대에는 몇 해가 멀다 하고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에, 미혼 남자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미망인이 재혼 상대방을 찾는 일은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돌싱'들이 경제력을 갖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을 버려둘 경우에는 사회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삶의 터전이 없는 백성이 늘어나는 것만큼 위정자에게 고민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형사취수 제도는 그런 여인들이 생활 터전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였다. 이렇게 하자니, 자연히 일부다처를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같은 시기에 동아시아에서 일부다처가 꽤 유행했다는 점은 일본의 사례에서도 드러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왜국 편에 따르면 당시 일본의 귀족들은 네댓 명의 부인을 데리고 살았고 평민 중에도 부인 두셋을 데리고 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