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발표하는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연합뉴스
박정희는 더이상 전두환에게 정치권 진출을 권하지 않았다. 용도가 분명히 정해진 셈이었다. 이것이 훗날 김재규에 의한 10·26 거사가 터진 뒤,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을 거쳐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의 씨앗이 될 줄 그 당시에는 아무도 알 수 없었을 터다. 박정희가 그때 차지철처럼 전두환을 정치권으로 끌어냈더라면 역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부질없는 역사에서의 가정이지만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후 박정희는 전두환이 전방이나 후방 어디에서 근무하든 1년에 두어번 그를 불러 만났다. 골치아픈 일에 대해서도 의견을 들었다. 그럴 때마다 박정희가 전두환에게 '하사금'을 주고 어깨를 두드려 주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는 일이다.
박정희가 전두환에게 국회의원을 하라고 권유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5·16 쿠데타가 발생한 날, 서울대 문리대 ROTC 교관으로 근무하던 전두환 대위는 재빠르게 오전 8시경 육군본부에 나타난다. 육사동창회인 북극성회의 서울 지부장인 이동남 대위와 함께였다. 이미 고참 대위가 된 이들도 고위 장성의 부관이나 육군본부 등 수도권 부대에 근무하는 동기생들이 상당수여서 무시할 수 없는 정보 네트워크가 갖추어져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오후 2시 반경, 서울 태릉의 육군사관학교.
육사 연병장에 지프 한 대와 트럭 2대가 들이닥쳤다. 착검한 M1소총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트럭에서 뛰어내렸다. 이어 지프에서는 날카로운 눈초리를 번뜩이며 장교 3명이 내렸다. 이들은 기세 등등하게 학교 본부로 들어갔다. 육사 8기의 쿠데타 주체세력 핵심인 오치성 대령(후에 공화당 사무총장, 내무장관)과 박창암 대령(혁명검찰부장, 나중에 반혁명사건으로 투옥), 차지철 대위(후에 국회 외무위원장, 청와대 경호실장)였다. 육사를 '혁명대열'에 끌어넣는 것이 이들의 긴급 임무였다.
쿠데타 군 측에서 온 오치성과 차지철은 육사 간부장교들과 생도대표에게 '군사혁명'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생도대표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학교 지휘계통은 육본을 장악한 혁명위원회의 명령이 옳은지 그른지를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북극성 동창회의 선배들과 상의하겠다." 그러나 생도대표들과 북극성회 간부들이 가진 시국대책회의에서는 쿠데타 측의 요구를 거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당시 북극성회는 육사 11기 이후 졸업생이 참여하는 순수한 동창회였다. 주로 성적우수 졸업자들로 육사 교수부에 근무하는 동기생들이 간부를 맡았다. 전두환 등의 하나회계는 성적우수자가 없었으며 교수요원도 없었다. 전두환은 그러나 교수부 동기생들을 통해 북극성회와 생도대표들의 동향을 기민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전두환의 밀고 "강영훈 교장이 육사생도들 지지행진 방해" 전두환은 육군본부에서 이상훈(육사11기, 노태우 정부 때 국방장관 역임) 등과 함께 정규육사 출신들이 모여 박정희 주도의 군사혁명에 적극 가담하기로 결의한다.
5월 16일 저녁, 전두환 등은 육본에 설치된 군사혁명위 본부에 들어가다가 김종필과 마주쳤다. 전두환은 김종필에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이렇게 중대한 일을 하면서 왜 우리에게는 아무 연락도 안 했습니까." "비밀 유지도 어려웠고 서두르다 보니 다 연락하지 못하고 빼 먹은 데가 생긴 거 같은데, 어쨌든 지금부터 협력합시다." "그렇잖아도 지금 막 저희 동기생들이 모여 육사 동창생들은 이번 군사혁명에 적극 함께 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아, 그래요, 잘 됐군요." "육사생도들의 지지시위를 이끌어 내는 것이 중요한데, 잘 안된 모양입니다. 우리가 맡아 해 보겠습니다." "좋아요. 차량 등을 지원하라고 할 테니까, 성공시켜 봐요." 전두환 등은 그날 밤 차량과 무기를 지원받아 육사로 갔다. 그러나 육사에 근무하는 장교들은 쿠데타 반대 분위기였고 더구나 강영훈 교장이 일절 움직이지 못하도록 금족령을 내린 상태였다.
다음날인 5월 17일 저녁, 육사 교장 강영훈이 육군본부로 간 것을 알고 전두환은 뒤쫓아 갔다. 육본의 쿠데타 본부에서 강영훈은 장도영과 박정희로부터 육사생도들의 지지시위를 독촉받는다. 그러나 강영훈은 "생도들 중에도 찬반이 갈려 있어서 어렵다"면서 "억지로 시가행진을 시키면 어떤 일이 생길지 예상할 수 없다"고 반대의사를 폈다.
이때 전두환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전두환은 쿠데타 주모자들인 박창암· 박치옥 대령에게 "강영훈 교장이 육사 장교들과 생도들에게 금족령을 내려 혁명 지지시위가 방해받고 있다"고 일러바쳤다. 그때까지 들었던 강영훈의 상황 설명과 딴판이었다. 강경파로 후에 혁명검찰부장을 맡았던 박창임은 강영훈과 전두환을 대질시키자고 나섰다. 그러나 아직 반혁명으로 찍히기 전의 고위장성과 새파란 대위급 장교를 대질시키지는 못했다.
그때까지 쿠데타의 최고지도자이던 장도영 육참총장이 전두환에게 물었다.
"귀관들, 육사쪽이랑 도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오?" "각하, 저희는 결의를 다졌습니다. 저희 육사출신 장교들과 생도들은 군사혁명에 신명을 바치기로 했습니다." 육사교장 강영훈 구금 후 생도 시가행진...전두환의 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