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박정희 정권에 의한 테러는 비단 야당 정치인뿐 아니라 모든 비판자들에게 가해졌다. 법관과 비판적 언론인도 군인이나 괴한으로부터 폭행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체제폭력의 최종 책임은 역시 그 체제의 최고 권력자로부터 비롯된다. 권력자의 인식과 의지가 마치 마피아 두목의 그것처럼 지령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민주정치의 기본인 권력분립과 법관에 대한 박정희의 부정적 인식은 정권 초기에 드러났다.
1963년 4월 어느 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당시 검찰총장 정창운을 불러들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정부에 반대하는 놈들을 기껏 구속해 놓으면 법원은 풀어주니 이따위 짓이 뭐요. 검찰이 뭐하고 있길래 …" "판사들이 구속적부심사를 해서 불구속 수사하라고 하니 도리가 없습니다." 박정희는 그 자리에서 검찰총장에게 서울지방법원장을 불러오라고 호통을 쳤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이 법관을 부른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짓이다. 언론과 국민 여론이 가만 있지 않을 일이다. 그러나 총구에서 나온 권력을 휘두르는 쿠데타 주도자의 초법적 명령이니 어쩔 수 없었다.
홍남표 법원장(후에 대법원판사 역임)이 불려 왔다. 박정희는 홍 법원장에게 야단치듯 큰 소리를 냈다.
"아니, 법원은 이래도 되는 거요? 툭하면 경찰과 검찰이 힘들여 잡아들인 범법자들을 풀어주고 말이지, 왜 정부가 하는 일에 지장을 주는 거요." 홍 법원장은 박정희가 아무리 쿠데타 주동자지만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인 3권분립과 법관의 독립성을 전혀 모르는 듯한 말투에 난감함을 느꼈다. 그러나 차분히 법관으로서 할 얘기를 했다.
"법관의 지위와 직무행위는 헌법과 법률에 규정돼 있습니다. 법관은 오로지 헌법과 법률에 근거하여 자신의 양심에 따라 심판합니다. 아무도 그 독립성을 훼손할 수 없습니다. 행정부 관료들처럼 상명하복 관계가 아니고 한 사람 한 사람이 헌법상 보장된 독립관청입니다. 제가 법원장이지만 판사 개개인의 판결에 간섭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꼭 중학교 사회교과서에 쓰여 있는 정도의 상식을 읽듯이 법원장은 쿠데타 권력자 앞에서 기죽지 않고 피력했다. 박정희는 처음부터 민주정치나 권력 분립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에피소드다.
그런 통치자 아래서 껄끄러운 법관을 비롯한 비판세력에게 군 특수부대원들의 테러가 수시로 터졌다. 박정희에게는 야당정치인뿐 아니라 비판적 언론인과 학생운동권이 눈에 가시였다. 이들을 다스리는 수단으로 군부와 중앙정보부 등에 의한 테러가 수시로 자행됐다.
판사 앞에서 수류탄 자폭위협 "데모학생 구속영장 서명하라" 박정희가 법관들에게 불만을 토로한 지 1년쯤 지난 1964년 5월 21일, 새벽 4시 반경.
서울 서소문의 법원청사 정문 앞에 군용 구급차 한 대가 들이닥쳤다. 여명이 채 열리기도 전 어둠이 깔려있는 법원 건물은 조용했다.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대학생 시위가 한창이었지만 아직 6·3 계엄령사태 이전이어서 군용 차량의 출동은 긴장감을 주었다.
차 안에서 얼룩무늬 군복에 권총과 카빈소총으로 무장한 군인 12명이 뛰어내렸다. 이들은 수위를 불러 법원 숙직 판사실로 안내하라고 요구했다. 1층 숙직실에 가 보니 판사는 이미 퇴청한 뒤다. 이들은 다시 차를 몰아 이날 밤 당직 판사인 서울지방법원 양헌 판사 자택을 찾아간다.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4가 돈암초등학교 옆의 양헌 판사 자택. 새벽 시간에 문을 두드리고 들이닥친 얼룩무늬의 군인들은 양 판사에게 다그쳤다.
"데모학생들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이유가 무엇이냐? 영장에 서명할 것을 약속해!" "나는 이렇게 집에 있을 때는 한 개인이지만 영장에 서명할 때는 엄연한 헌법기관이오. 그렇게는 안 돼요." 그러자 군인들은 수류탄을 꺼내 보이며 협박했다.
"그냥 돌아가도 우리는 죽는데, 여기서 자폭할 테니 알아서 하라." "나도 이북에서 월남해 고생하며 독학으로 고등고시 합격하고 군 법무관도 한 사람이오. 이것이 무슨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일이라고 죽는단 말이오." 양 판사는 조서를 검토하던 생각이 났다. 공안당국은 시위를 구경하는 사람까지 잡아다가 구속하려 했다. 돌을 던지지 않았다고 부인하는 대학생에게 "돌을 안 던졌다는 증거를 대 보라"고 묻는 웃지 못할 조서도 있었다.
이 양헌 판사 겁박사건은 <동아일보>에 크게 보도됐다. 당시만 해도 <동아일보>는 양심이 살아있는 정론지였다.
6월 6일 새벽 1시 반, 공수단 복장의 장교 8명이 광화문 동아일보사 편집국에 난입했다. 그렇잖아도 이때는 6·3 계엄령이 선포된 직후여서 언론이 잔뜩 위축된 상황이었다. 군 장교들은 험악한 기세로 난폭한 언사를 써가며 기자들을 겁박했다. 사건은 사전 검열로 보도되지 못했지만 소문으로 퍼져나갔다. 시중 여론이 악화되자 계엄사가 자체조사를 벌였다.
난입 장교들은 1공수특전단 최아무개 대령 등 행동대 8명이었다. 민기식 계엄사령관이 사과문을 발표하고 난입 장교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민심수습 차원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안할 수가 없었으나 최 대령만 유죄이고 나머지는 모두 무죄였다. 배후조종 책임자는 가려지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김대중과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후 박정희 권력에 대해 보인 태도가 흥미롭다. 김대중은 자신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박정희·전두환과 화해를 추구했다. 그러나 김영삼은 자신이 경험한 정치테러에 대해 엄정하게 조사하고 응징했다. 사회적 기반이 강한 사람은 소신대로 징벌했지만 그것이 취약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가슴이 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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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정치학과 학사 석사 박사, 하버드대 니만펠로십 수료. 동아일보 논설위원, 오마이뉴스 논설주간,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장, 한국정치평론학회 회장,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 제17대 국회의원, 방송통신위 상임위원-방송평가위원장, 서울디지털대 총장 등 역임. 현재 서울미디어대학원대 석좌교수. 저서 : '한국정당과 정치지도자론' '군부와 권력' '우리시대의 정치와 언론' 외 10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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