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계정사시인묵객은 간데없고 주택가 사이에 쇠락한 모습이 을씨년스럽다
이정근
"자, 여기를 주목해 주시오. 이제부터 김처사가 우리의 사랑방 당호를 발표하겠답니다."안평이 썰렁해진 분위기 쇄신을 꾀했다.
"기(氣)가 센 땅이기에 너무 높은 당호를 지으면 기에 치일 수 있으니 무계정사라 지음이 가할 줄 아뢰옵니다.""궁, 궐, 전, 당, 합, 각, 재의 재(齋)도 아니고?"안평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궁궐이 아니기에 궁, 궐, 전 까지는 조금 과하지만 적어도 당(堂)은 나올거라 기대했는데 급 실망한 것이다.
선조들은 건축물에 당호를 지을 때 궁(宮), 궐(闕), 전(殿), 당(堂),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루(樓), 정(亭), 원(園)이라는 순위를 존중했다. 이것은 누가 강요해서 라기보다도 스스로 낮추어 부르는 겸양이다. 헌데 김보명은 이마저 뛰어넘어 정사(精舍)로 간 것이다.
"뭔가 이룰 때까지는 몸을 더욱 낮추고 드러내지 말자는 것입니다.""좋아, 좋아, 김 처사의 말이 옳아."김보명의 속내를 간파한 안평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던 주변 사람들에겐 안평의 웃음이 허허로운 웃음소리로 들렸다.
피를 나눈 한살 터울 형제지만 판이하게 다른 성격무계정사. 안평만 오늘 처음 듣는 당호이지 장안의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이름이다. 드러내놓고 말하기를 좋아하고 과장하기를 좋아하는 김보명이 '안평 당사(黨舍) 터를 내가 잡아주었는데 당호는 무계정사로 할 것이다'라고 떠들고 다녔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안평과 수양의 성격이 확연히 갈린다. 격식을 싫어하는 안평은 모든 것을 열어놓고 지내고 수양은 감춘다. 안평은 자기를 싫다고 떠난 사람이 다시 와서 머리를 조아리면 받아준다. 반면 수양은 배신 때리고 떠난 사람이 되돌아와서 용서를 빌어도 다시 보지 않는다. 안평은 자신의 주변에 세작이 얼씬거려도 '알아도 모른 척 몰라도 모른 척'하지만 수양은 발견 즉시 매질하여 돌려보낸다. 이현로가 매 맞은 게 바로 그것이고. 지금 현재 이 자리에 회색스러운 이몽가가 있어도 안평은 신경 쓰지 않는다.
안평은 내편 네편 편 가르는 것을 싫어했다. 덕을 베풀면 모여들고 실망하면 떠나는 것이 인간군상인데 굳이 부르고 붙잡을 게 뭐있냐는 것이다. 이러한 성정은 정보관리에도 뚜렷이 나타났다. 수양은 보안에 철저한 반면 안평은 인간 이용이 감추어야 할 비밀이 뭐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러한 성격 차이는 국가관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나라는 임금 혼자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신하들과 조화롭게 끌고 가면 된다는 것이 안평의 생각이었고 '임금은 임금이고 신하는 신하다. 신하가 신권을 이유로 발언의 강도를 높여간다면 종내는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현(擇賢)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것이 수양의 생각이었다. 이러한 시각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