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역사 1> 겉그림.
들녘
오늘 소개하는 피터 왓슨의 <생각의 역사 I>(남경태 옮김, 들녘)은 한 번 도전해 볼 만한 교양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엉덩이가 무거워야 이 책을 끝낼 수 있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이 책의 자매지라 할 수 있는 왓슨의 두 번째 책 <생각의 역사 II>(이광일 옮김, 들녘)까지 전부 읽는다면 나는 그 사람의 끈기를 무조건 인정할 것이다.
<생각의 역사 I>이 1200쪽이 넘고 <생각의 역사 II>는 1300쪽이 넘는다. 그러니 두 책 전부 합쳐 무려 2500쪽이 넘는 셈이다. 글자 수를 생각한다면 300쪽짜리 책 10여권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나는 이 두 권의 책을 지난 2009년 겨울에 오기와 끈기로 읽었다. 3주간에 걸쳐 두 권의 책을 전부 독파했을 때의 뿌듯함은 마치 입시를 끝낸 수험생의 심정이었다.
이런 독서를 하게 된 데는 과거 내가 고시공부를 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것은 호사스런 독서다. 인내심도 필요하지만 생활에 바쁜 사람들이라면 이런 독서를 하고 싶어도 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겐 책임이 있다. 이 책을 읽지 못한 사람들에게 소개할 책임 말이다.
내가 <생각의 역사 I>을 발견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2009년 11월 나는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국제인권 심포지엄에 참가했다. 심포지엄이 끝나고 돌아오기 전 잠시 시내관광을 하였다. 그때 조그만 서점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Ideas: A History of Thought and Invention, from Fire to Freud>라는 두툼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언뜻 목차를 보고 몇 장을 넘겨보니 '야, 이것 대단한 교양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류사의 사상 및 발명의 역사라고나 할까. 거기에는 내가 그동안 알아 왔던, 알고 싶어 했던 온갖 철학, 예술, 문학, 과학이야기가 일목요연하게 설명되고 있었다. 일찍이 읽었던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와는 또 다른 감흥이었다(빌 브라이슨의 책은 자연과학에서 본 <거의 모든 것의 역사>이다).
그래서 한 권 사서 호텔에 돌아 와 한국의 지인에게 연락을 했다. 이 책이 번역되지 않았으면 나하고 공동으로 번역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그런데 한국 교양인들의 정보도 대단하다. 내가 발견하기 바로 몇 달 전에 한 출판사에서 이 책이 이미 번역되었던 것이다. 제대로 된 교양서 한 번 번역해서 나도 우리나라의 교양수준에 조금 기여를 하려던 목표는 좌절되었지만 대한민국의 교양 수준에 자부심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이 베개만한 책 한 권과 이 책에 이어지는 또 하나의 베개만한 책을 읽게 된 것이다(<생각의 역사 II>는 <생각의 역사 I>과는 완전히 별개인 책이나 '생각'의 역사라는 점에서 같은 주제를 다룬 책이다. 이 책은 20세기의 지성사이다).
피터 왓슨, 인류지성사를 탐사보도하다생각의 역사를 쓴 피터 왓슨은 세칭 세계적인 석학은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어떤 석학보다도, 어떤 전문가보다도 교양적 측면에서는 독보적이라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만물박사다.
그는 영국 출신의 교양 저널리스트다. 좌파 시사 주간지인 <뉴 소사이어티>에서 일했으며, 선데이타임스, 뉴욕타임스, 옵서버, 타임지 등에서도 일했다. 오랫동안 예술관련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맥도날드 고고학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일한다.
이런 경력만 보아도 그가 어떤 특정 영역의 전문가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제너럴리스트'로 살아 왔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그랬기에 이런 책을 쓸 수 있으리라. 특정 영역의 전문가는 이런 책을 쓰기 어렵다. 왓슨은 저널리스트로 탐사보도를 많이 다뤄왔듯, 인류의 모든 지성사를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탐사보도한다는 태도로 이 책을 썼다.
우선 책의 전체 구성이다. 책은 크게 5부 36장으로 이루어졌다. 제1부는 인류의 탄생부터 도시문화를 만들기까지의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인간 상상력의 진화를 다룬다. 인간은 과연 어떻게 불을 발견하고 언어를 만들었을까, 인간의 종교적 심성의 기원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인간은 어떻게 도시를 만들게 되었을까, 등등의 문제에 대해 왓슨은 상상력을 발휘한다. 제2부는 영혼의 진화사이다. 이곳에서는 역사에 나타나는 대표적 종교, 특히 기독교의 탄생기원 등이 설명된다. 제3부는 유럽의 탄생이다. 여기에서는 유럽이 어떻게 동양을 능가하게 되었는가가 집중적으로 조명된다. 제4부는 유럽이 만든 경험주의적 실험정신의 진화과정을 추적한다. 대학과 학문의 발달, 과학혁명과 신세계의 발견 등이 바로 추적대상이다. 제5부는 산업혁명 이후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정신사를 다룬다. 계몽주의에 반발하는 낭만주의에서 비롯된 인간의 자아의식은 드디어 20세기 초 프로이드의 무의식 세계로 연결된다.영혼, 유럽, 실험으로 만들어진 지성사자, 사설은 이 정도에서 마치고 간단하게나마 이 책의 핵심에 들어가 보자. 1200쪽이 넘는 인류의 사상과 발명의 역사를 간단히 소개하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왓슨이 인류지성사를 탐사하면서 발견하고자 했던 인류의 '생각'(ideas)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왓슨은 서론에서 결론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역사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것이 무엇인가를 탐구한다. 그가 발견한 것이 바로 '영혼', '실험정신', '유럽의 관념'이다. 어쩌면 이 방대한 책은 이들 셋을 주인공으로 해서 역사를 종횡으로 이어 본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왓슨은 영혼이 역사에 끼친 영향력을 말한다. 영혼은 신이나 종교보다는 넓은 개념이다. 따라서 영혼을 반드시 종교적 측면에서 볼 필요는 없다. 이것은 인간의 육체를 초월한 정신세계를 말한다. 영혼과 관련되어 역사에 영향을 준 것은 인간의 내면지향에 대한 자각이다. 이것은 내세 관념으로 발전하여 종교와 관련을 맺는다.
또한 이것은 인간 내면에 대한 철학적 자각과도 관련이 있다. 인간의 내면화는 기원전 7~4세기에 팔레스타인, 인도, 중국, 그리스, 페르시아 등지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이 시기 이후 인류사에서는 인간의 내면에 관심을 갖고 진리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 종교와 철학을 통하여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정신이 물질보다 우월하다는 플라톤적 관점이야말로 인간의 영혼 그리고 내세와 관련된 서양철학의 대표적 관념이다. 플라톤 이후의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말은 바로 이런 영혼사상의 영향이다. 이러한 탓에 서양사는 중세를 기독교 시대로 기록하였고, 근대에 들어서는 계몽주의에 맞서는 낭만주의의 물결이 휩쓸고 갔으며, 심리학의 '자아' 시대를 경험하였다. 나아가 20세기는 정신분석학의 '무의식'시대를 맞이했다.
실험정신의 역사와 유럽의 형성둘째로 왓슨은 실험정신이 인류 역사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말한다. 왓슨은 이러한 정신을 유럽에서 발달한 경험주의적 과학정신에서 발견한다. 이것은 관찰, 실험, 추론에 입각한 과학적 사고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