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25량을 달고 달리는 시베리아열차
박도
17: 00 열차가 소리도 없이 블라디보스토크 역 플랫폼을 벗어났다. 객차에 혼자 타고 간다는 것은 러시아 철도국에는 좀 미안했지만 나에게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더욱이 맨 뒤 칸이라 좌우 차창은 물론 열차 뒤 풍경까지 두루 마음대로 살필 수 있기에 더 더욱 좋았다.
여행 중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면 더 없이 좋으련만 사실 그런 사람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만원 객차에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의 승객 틈에 꼼짝달싹할 수 없이 오랜 여행을 한다면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사실 나는 좀 별난 편이다. 특히 답사 여행 중에는 차를 타고 가면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별난 풍물을 보면 차를 세워 카메라에 담곤 하기에 집사람조차 나와 같이 다니기를 꺼려한다. 그래서 나도 누군가 동행하면 상대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기에 가능한 답사여행은 혼자 다니는 편이다.
열차가 아무르만을 끼고 북으로 달리자 왼쪽 차창으로는 장관이 펼쳐졌다. 곧 수평선으로 넘어갈 해가 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열차 뒤로는 곧게 뻗은 시베리아 철도가 뒤따르고 있었다. 어디선가 체첸의 비애가 담긴 '백학'이 들려오는 듯하다.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 싸우다 '죽은 전사'를 찬미하는 이 노래는 약소민의 아픔이 물씬 묻은 노래다. 가사에는 '돌아오지 않은 병사'라는 노랫말이 있는데 꼭 일백년 전 열차를 이 길을 달렸던 안중근도 끝내 '돌아오지 않는 전사'가 아닌가.
18: 00, 갑자기 차창에 비가 뿌렸다. 어둠으로 창밖의 풍경이 보이지 않자 차창에는 내 얼굴이 점차 선명해졌다. 사나이로 태어나 할 일도 많지만 이 늘그막에도 잃어버린 나라를 찾겠다고 목숨을 버린 전사의 자취를 찾아가는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아닌가. 갑자기 이번 답사 중에 죽어도 조금도 억울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