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숙빈의 무덤인 소령원(昭寧園).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발행 <숙빈최씨자료집>
인현왕후 폐위 이전의 최 숙빈과 관련해, 사료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주요 정보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천민 출신의 최 숙빈이 5세 이전에 부모를 모두 잃고 나이 7세에 궁녀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최 숙빈이 어렸을 때에 가족이 모두 죽었다는 드라마 내용과 달리 오빠와 언니를 포함한 최 숙빈 삼남매가 정상적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궐에 들어간 최 숙빈이 침방나인을 거쳐 인현왕후의 시녀가 되었다가 왕후의 폐위를 계기로 침방으로 도로 복귀했다는 것이다.
위의 프로필에서 알 수 있듯이, 인현왕후 폐위 이전의 최 숙빈은 오래도록 하급 궁녀 생활을 지냈다. 그는 궁녀 생활의 대부분을 침방에서 바느질하는 데에 바쳤다. 궁녀 시절에 관한 자료가 이처럼 일천하기 때문에, 왕후 폐위 이전의 최 숙빈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았는지를 정확히 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인현왕후 폐위 이후의 최 숙빈의 행적을 통해 그 이전의 최 숙빈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대략적이나마 추론할 수 있다.
가난한 고아 청년이 나이 서른에 야간대학에 입학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우리는 그가 그 이전에 힘겨운 고학 생활을 했으리라고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피겨스케이팅의 불모지에서 태어난 어느 소녀가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우리는 그가 그 이전에 피나는 훈련생활을 했으리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마찬가지다. 최 숙빈의 삶에서도 그와 유사한 추론을 가능케 하는 대목들이 있다. 어떤 것들일까?
숙종 18년(1692)의 어느 날 한밤중에, 스물세 살의 최 숙빈은 완전히 깜깜해진 궁궐 안에서 홀로 등불을 환하게 밝힌 채 폐비 인현왕후의 생일을 혼자 기념하다가, 때마침 궐내를 배회하던 숙종의 눈에 띄어 그와 우연히 조우하게 된다. 숙종 2년(1676)에 입궁했으므로, 최 숙빈은 무려 16년 만에 숙종과 대면한 셈이다.
"(이 한밤중에) 너 지금 뭐하는 거냐?"라는 왕의 질문에 대해, 최숙빈은 당돌하게도 "중전(폐비)의 탄신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라고 답변하여 숙종의 호기심과 관심을 끄는 데에 성공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죄인 신분인 폐비의 생일을 기념하는 이 같은 행동은 엄중한 처벌을 초래할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폐비에 대한 처우를 개선해 달라"는 서인 당파의 상소가 숙종의 심경을 어지럽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집권당인 남인 당파에 대한 숙종의 신뢰도 점차 약해지고 있었던지라, 서인 출신의 폐비를 옹호하는 최 숙빈의 행동은 왕의 노여움을 초래하기는커녕 도리어 그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정치적 변화와 국왕의 심경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 없었다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입궁 16년 동안 동이는 무얼 보고 배웠을까그뿐 아니라, 훗날 최 숙빈은 아무 물증도 없이 거듭거듭 숙종에게 장 희빈의 허물을 보고하여 희빈을 중전 자리에서 끌어내린 데에 이어 죽음으로까지 몰아넣는 데에 성공했다. 이런 것들은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남인 당파의 힘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을 때에 '때마침' 숙종에게 장 희빈의 허물을 보고한 일이나 서인 당파의 힘에 편승해서 장 희빈을 공격하면서도 결코 당파 색깔을 띠지 않음으로써 끝까지 숙종의 신뢰를 받은 일 등을 보면, 최 숙빈이 제갈공명 못지않은 '고도의 전략가'였다는 느낌을 감출 수 없게 된다.
후궁이 된 뒤로 오랫동안의 훈련을 거쳐 정치감각을 익혔다면 모를까, 우연히 왕을 만난 그 순간부터 노련한 정치감각을 발휘하기 시작한 최 숙빈. 그런 최 숙빈의 모습을 보노라면, 우리는 여인천하에 뛰어들기 이전부터 이 여인이 이미 조정의 정치구도와 숙종의 통치스타일을 세밀히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남한테 정치를 배웠을 가능성이 별로 없는 스물세 살의 하급 궁녀가 역사무대에 등장하자마자 고도의 정치적 센스를 발휘해 나갔다면, 그가 그 이전부터 이미 그런 쪽으로 자기 자신을 훈련시켰을 것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봉제공장'(침방)에서 '기숙사'로 돌아온 뒤에 열심히 서책을 뒤적이는 최 숙빈의 모습. 나이 많은 상궁들 간의 상호관계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그 속에서 궐내 인간관계를 배우는 최 숙빈의 모습. 장희빈과 인현왕후에 관한 궁녀들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면서 두 여인의 스타일을 파악하는 한편, 이 여인들을 다루는 숙종의 행동패턴을 나름대로 궁리하는 최 숙빈의 모습.
여인천하에 뛰어들기 이전의 최 숙빈은 아마 그런 모습을 띠지 않았을까. 구체적인 양상이야 물론 확인할 수 없지만, 우리는 역사에 등장하기 이전의 최 숙빈이 어떤 형태로든 남모르게 열심히 정치적 능력을 계발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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