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글세방 할머니가 채려준 밥상 앞에 앉아 있는 큰 아들 송인효.
송성영
결국 고장 난 컴퓨터를 수리 센터에 맡겼는데 복구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하드 디스크를 새로 교체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출판 예정인 원고 자료는 물론이고 그동안 틈틈이 기록해 놓은 원고며 사진이 몽땅 날아가 버렸지만 다행히 공주 왕촌 학살지에 관련된 자료는 외장하드에 옮겨져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 어쩌겠습니까. 출판 예정인 원고는 프린트를 해 놓았기에 다시 정리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아빠 컴퓨터에 중요한 자료가 있으니 손대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그 약속을 어겨? 너 아빠하고 약속 어기고 사고 친 게 벌써 몇 번째여. 니가 선택해, 집 짓는 공사현장에서 아빠하고 생활하든지 아니면 혼자서 배낭 메고 여행을 떠나던지."사고를 낸 당사자인 큰 아이 인효 녀석에게는 중요한 자료가 다 날아가 지난 1년 동안 고생한 것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됐다며 시치미 뚝 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녀석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였습니다.
"아빠하고 고흥에 갈게.""거기가면 틈틈이 책 읽어가며 아빠 일 도와야 혀.""알았어."녀석은 엄동설한에 홀로 배낭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엄두가 나질 않았던 모양입니다. 방송에 출연할 다큐멘터리 주인공을 섭외해 놓고 녀석이 독파해야 할 책 보따리를 싸들고 다시 고흥으로 향했습니다.
녀석을 집 짓는 현장으로 데려 가는 데는 두 가지 노림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보금자리를 위해 거센 바람을 맞아가며 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수고하는지 노동의 현장을 체험케 하고 싶었고 또 다른 이유는 방학 내내 공부를 하니 안하니 엄마 하고 티격태격 입씨름 하고 있을 게 불 보듯 빤하니 거기에서 잠시라도 해방시켜 주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유배지로 떠나는 죄인처럼 녀석은 기가 팍 죽어 내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평소 말 많은 녀석이 입을 닫고 있는 게 보기에 안쓰러워 말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미 지난 일이니까 다 잊어 버려, 고흥에 가서 아빠 일 거들어 줘 가며 여기저기 여행도 하고 그러자. 그 대신 너 아빠하고 약속 한 거 지켜야 혀." "알았어, 먼저 데미안부터 읽을 게."
녀석의 얼굴이 금새 환해졌습니다. 녀석의 얼굴색이 밝아지는 것을 보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비록 사고를 쳤지만 군소리 없이 아빠의 의견에 따라 주는 녀석이 고마웠습니다. 친구 하나 없는 바닷가 마을, 그것도 텔레비전은 물론이고 인터넷도 들어오지 않는 외딴 오지로 이사 가겠노라 했을 때 군소리 없이 동의해준 녀석이었습니다. 정든 친구들과 헤어져야 하는 심적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말입니다.
내 마음자리에 따라 얼굴색이 달라지는 녀석.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를 떠나서 나는 녀석에게 무엇인가 싶었습니다. 평등한 인격체로서 나는 녀석에게 강요하는 측면이 더 많습니다. 돌이켜 보면 컴퓨터 자료가 날아간 것에는 녀석만의 일방적인 책임이 아니었습니다. 내 책임도 있었습니다. 비록 낡고 오래된 컴퓨터였지만 그걸 놔두고 따로 공사 현장에서 쓰겠다며 20만 원짜리 중고 노트북을 함부로 구입한 게 화근이 되었던 것입니다.
물질의 풍요는 그 어떤 소중함을 저버리게 합니다. 녀석은 '아빠에겐 노트북이 있으니 고장 나도 큰 걱정할 것없다'는 식으로 노트북을 단단히 믿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노트북이 없었더라면 비록 낡은 컴퓨터라곤 하지만 녀석은 함부로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결국 노트북 구입을 통해 녀석에게 화근의 씨앗을 뿌린 것은 바로 나였던 것입니다.
공주에서 고흥까지 3시간 40분 거리. 점심을 먹고 출발해서 고흥에 도착하면 어둠이 깔리기 시작합니다. 목수들이 며칠 동안 휴가를 떠난 상태라서 집 짓는 현장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가늘고 긴 밧줄을 늘어 뜨려 묶어 놓았던 우리 집 개 곰순이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밧줄이 끊어져 있었습니다. 이빨로 끊은 자국이 선명했습니다. 어둠 속을 헤매고 다니며 수없이 불러 대자 5분쯤 지나서 녀석이 저만치서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왔습니다. 숨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녀석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이틀 동안을 내내 혼자서 지냈으니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밧줄까지 끊고 주인을 찾아 해매고 다녔을 녀석이 고맙고 미안했습니다.
"어? 아빠 곰순이 목걸이가 없어? 누구한티 잽혀 갔다가 탈출해 나온 거 아녀?""아녀 밧줄을 이빨로 끊었는디."인효 녀석 말대로 곰순이 녀석의 목줄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녀석을 임시로 목줄을 만들어 묶어 놓고 사글세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밥은 먹었소?""도시락 싸와서 먹었는디요.""아따 잘 생겼네이. 우리 손자도 저 만한 게 두 개나 되는 디..."사글세방 주인 할머니가 인효 녀석을 보더니 녀석 만한 손자가 두개나 된다고 하십니다.훗날 알게 된 것인데 사글세방 할머니뿐만 아니라 내가 만난 대부분의 이곳 노인들은 손자들을 숫자 헤아리듯 한 개 두 개로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한 두 끼 겨우 먹고 생활할 무렵 기아로 죽어나가는 손주들을 보면서 그렇게 불렀는지 모릅니다.
"아빠 배고파.""할머니가 밥 주신다고 할 때는 가만히 있더니 도시락 먹은 지 한 시간도 채 안 됐는디 벌써 배고퍼?""컵라면이 먹고 싶어서.""그려 나도 모처럼 컵라면 한번 먹어 보자."먹고 나면 배고플 나이 열 여섯, 송인효 녀석은 눈 깜박할 사이에 컵라면 한 개를 비우고 나더니 함부로 방구를 뿡뿡 발사해 댑니다. '컴퓨터 바이러스 사건'의 중압감에서 완전히 해방된 모양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세면을 하다 보니 얼굴이 뚱뚱 부어 있었습니다. 속도 쓰렸습니다. 몇년만에 먹어 본 컵라면 때문이었습니다. 집터에 들러 곰순이 녀석에게 밥을 주고 인효 녀석과 함께 도화면에 있는 마트에 들러 빵을 샀습니다.
녀석은 바나나 우유와 낱개로 포장된 빵 두 개를, 나는 중간치 크기의 우유와 열 개가 들어있는 호떡 빵 한 봉다리를 사들고 텅 빈 겨울 바다, 발포해수욕장 앞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작은 발바리 한 마리가 저만치서 눈치를 살피고 있었고 우리는 바다를 바라보며 빵과 우유로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그 빵은 얼마여?""어디 보자 이거? 한 줄에 1800원이라고 써 있네.""야, 그렇게나 싸. 열 개에 2000원도 안하네.."발바리에게 빵조각을 떼주던 녀석의 두 눈이 휘둥그레 졌습니다.
"호떡 빵 열 개가 니가 산 빵 두 개보다 싸지? 아빠가 예전에 취재여행 다닐 때 밥 대신 이걸로 해결했어.""결혼 전에?""그래. 결혼 전에 카메라 가방 들쳐 메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산 기행도 다니고 섬기행도 다녔지. 돈 모아서 인도 갈 비행기 표 구하겠다고 열차 대합실 같은 데서 쭈그려 자면서 이 호떡 빵하고 우유 중간 크기 하나를 사서 하루를 먹었어. 너두 한번 먹어봐봐..." 녀석은 우유 한 통과 호떡 빵 한 줄로만 하루 세끼를 때웠다는 것에 놀라워하면서 호떡빵 한 개를 채 먹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립니다.
"맛은 별로네, 나중에 먹을게.""아직 배가 안 고파서 그려 임마. 하루 세끼 먹는 게 쉬운 중 알어?.""근디 왜 인도에 가질 않았어?""엄마 배속에 니가 생겨서 그렇지 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