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공로훈장허위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셨습니다. 뒷날 나라에서 내린 건국공로훈장이 전시관 가장 앞에 전시되어 있어요.
손현희
우리가 찾아간 때(12월6일)엔 하필이면 올해 들어 가장 춥다는 날이었어요. 자전거를 세우고 들어서려는데, 기념관 한가운데에 허위 선생의 동상이 가장 먼저 반겨줍니다. 눈매도 날카롭고 곧은 의지가 돋보이는 그런 모습이었어요.
마침 안에서 일을 보시던 직원 한 분이 나와서 반갑게 맞아줍니다. 영상자료를 보고난 뒤에 둘러보는 게 훨씬 도움이 될 거라고 하시네요. '영상추모관'에서 50대 부부로 보이는 분들과 네 사람이 앉아서 함께 봅니다.
짧은 영상기록이지만, 허위 선생이 하신 일과 나라를 생각하는 올곧은 마음이 온몸에 그대로 전해집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내린 뒤, 경북 김천(옛 김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충북 진천까지 진격하다가 고종임금의 밀서를 받고 해산한 뒤에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관직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상을 알리고 온 국민이 의병의 대열에 나설 것을 알리는 '배일격문'을 돌리다가 '대한제국정부'를 압박하고 협박하는 일본 때문에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지요.
그 뒤에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일본에 우리 나라의 권리를 빼앗기게 되자 선생이 또 다시 의병을 일으켜 온 나라의 의병부대가 함께 일제의 통감부를 치려고 '서울진공작전'을 펼치지만 일본군에 밀려 그 싸움에서 지고 맙니다. 끝내 경기 북부에서 의병활동을 계속하던 선생은 일본군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1908년9월27일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셨습니다. 그것도 서대문 형무소에서 집행한 교수형1호라고 합니다.
안중근 의사도 칭찬한 허위 선생서대문형무소에서 돌아가시기에 앞서 유서로 남긴 글이 전시되어있었는데, 부모를 공경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선생의 올곧은 마음씨가 그대로 드러나 있더군요.
아버지의 장사를 아직 마치지 못했고/국권을 회복하지 못했으니/충성도 못했고 효도도 하지 못했으니/죽은들 어찌 눈을 감겠는가/ (왕산 허위 선생이 순국하기 전에 남긴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