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 미실.
MBC
현재 드라마 <선덕여왕>에선 정적인 덕만공주(이요원 분)를 제거하기 위한 미실(고현정 분)의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미실은 덕만을 제거하기 위해 상대편에게 술을 먹이고 속임수를 쓰고 군대를 동원하고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포정치를 시행하고 있다. 정적 한 명을 제거하기 위해 판을 크게 벌려 온갖 술수를 다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미실은 때로는 '명분과 합법'을 내세우고 때로는 '야비하고 치사한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이 중에서 미실이 더 중시하는 쪽은 전자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진평왕(조민기 분)과 옥새를 확보한 것도 명분과 합법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이처럼, 드라마 속의 미실은 정적 하나를 제거하기 위해 가지가지의 술수를 다 동원하는 한편 명분과 합법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럼, 실제의 미실도 과연 그러했을까? 역사 속의 미실은 정적을 제거할 때에 어떤 수단을 동원했을까?
실제 미실은 어떤 방법으로 정적을 제거했을까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미실이 제거한 주요 정적은 2명이었다. 제24대 진흥왕(재위 540~576년)의 장남인 동륜태자가 하나요, 진흥왕의 차남인 제25대 진지왕(금륜왕자, 재위 576~579년)이 또 하나였다. 진흥왕의 아들들이자 미실의 연인들이었던 동륜과 금륜이 모두 미실에 의해 제거된 것이다.
여기서 진지왕 제거는 미실이 단독으로 벌인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도태후(진흥왕의 왕후)와 함께 벌인 일이었다. 그리고 사도태후-미실 연대의 주도권은 사도태후 쪽에 있었다. 두 사람이 공동으로 벌인 데다 사도태후가 주도하는 일인지라, 진지왕 제거의 경우에는 미실 특유의 일처리 방식이 드러나기 힘들었다.
이에 비해 동륜태자 제거는 미실의 '단독범행'이었다. 미실이 자기 수하들을 동원해서 단독으로 벌인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건의 경우에는 미실의 일처리 방식이 잘 부각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륜태자는 드라마 속 덕만처럼 국정을 사실상 총괄하는 후계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실제의 미실이 후계자 동륜태자를 제거한 방식과 드라마 속의 미실이 후계자 덕만을 제거하는 방식을 비교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럼, 미실은 동륜태자를 어떻게 제거했을까?
'태자' 살해하고도 별다른 타격 받지 않은 미실
<화랑세기> 제6세 풍월주 세종 편에서는 "홍제 원년(572) 3월에 동태자(동륜태자)가 보명궁의 맹견사건 때문에 죽었다"고 기록했다. 연로한 진흥왕에 이어 조만간 차기 국왕에 오를 것이 확실시되던 동륜태자가 엉뚱하게도 개에 물려 사망한 것이다. 경호원들이 얼마든지 태자를 보호할 수 있었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경호원들은 무사하고 경호원들 틈에 있던 태자만 죽음을 당했다.
이상하다 싶어서, 진흥왕은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 수사를 지휘했다. 알고 보니, 이 사건의 범인은 후궁인 미실이었다. 진흥왕이 미실을 범인으로 판단한 것은 태자의 경호원들 중에 미실의 부하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미실의 명령을 받은 경호원들이 일부러 경호를 소홀히 하는 틈을 타서 누군가가 맹견을 태자 쪽으로 풀어놓았던 것으로 판단되는 사건이었다.
태자를 살해했는데도 불구하고 미실은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미실이 화랑도의 원화(源花) 자리에서 물러나고 풍월주 자리가 다시 설치되었지만, 새로운 풍월주의 자리는 미실의 측근인 설원랑에게 돌아갔다. 미실 입장에서는 아무 손실 없는 정변이었던 것이다.
미실이 개를 풀어 동륜태자를 제거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미실이 왜 그를 살해했으며 미실이 그러고도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는지를 일단 추적해 보기로 하자.
미실과 동륜태자가 과거에 진흥왕 몰래 밀애를 즐긴 적이 있기 때문에 '혹시 치정 때문에 미실이 동륜태자를 살해한 게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동륜태자와의 관계가 들통 날 것을 우려한 미실이 태자에게 미인들을 많이 소개해줬고 태자 역시 새로운 여자들에게 마음을 주며 미실과의 관계를 이미 정리했기 때문에, 사건 당시에는 두 사람의 애정관계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미실이 동륜태자를 살해한 본질적 동기는 <삼국사기> 권4의 진흥왕본기·진지왕본기·진평왕본기 속에서 규명될 수 있다. '동륜왕자가 태자가 된 시점'과 '동륜태자가 살해된 시점'의 전후에 어떤 정치적 변화가 있었는지를 추적해보면, 그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문화 수입해 왕권 강화하려 했던 진흥왕과 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