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금 통장
이장연
금융이 발달하고 신용사회로 접어들면서 사람들의 돈 개념이 무너졌다. 신용카드, 마이너스 통장이 생겨나고 인터넷뱅킹이 도입되면서 돈이란 것을 너무나 편리하게 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신용카드가 대중화되기 전에는 내가 가진 돈의 범위 내에서 써야 했기에 항상 은행의 잔고에 신경 쓰면서 돈을 썼다. 그러나 지금은 은행 통장에 돈이 없어도 돈을 쉽게 쓸 수 있는 세상이 되어서 내가 가진 돈과 상관없이 돈을 쓴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목돈이 나갈 일이 있거나 고가의 물건을 갖고 싶을 때는 적금 통장을 통해 돈을 모아서 사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요즘은 신용카드만 있으면 당장 돈이 없어도 손쉽게 살 수 있는데다가 마이너스 통장으로 인해 카드결제액이 조금 부족한 것 정도는 손쉽게 메울 수가 있다. 부족한 생활비도 마이너스 통장만 있으면 걱정 없다. 그래서 당장 다음 달에 얼마의 돈이 필요한지도 예측하지 않는다.
신경 써야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돈이 없어도 돈을 쓸 수 있으니 돈에 대해서 계획하고 따져보지 않아도 생활하는 데 큰 불편이 없다. 예전 같았으면 다음 학기에 들어갈 자녀의 등록금, 교재비 등을 미리 따져보고, 오래된 냉장고나 세탁기는 언제 바꾸는 것이 좋을지, 전세 만기가 되면 이사자금은 어떻게 마련할지 지출에 대해서 미리 계획하고 우선순위를 정했야만 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쓰다 보니 내 통장에 얼마의 돈이 들어있는지조차 모른다. 통장 잔액과 상관없이 돈을 쓸 수 있으니 카드 결제일이 아닌 이상 잔액 조회를 할 일이 없다. 통장정리는 안 한 지 오래다.
신용카드와 마이너스 통장만 있으면 걱정할 일이 없다. 당장의 카드 값만 메우면 된다. 돈에 대해서 계획할 필요가 없어지다보니 저축에 대한 동기 자체가 사라져버렸다. 저축 없이 신용카드와 마이너스 통장으로 가계를 운영하는 사이 저축률은 1%대로 10년 전의 20분의 1도 안 되는 상황이 되었고 상당수 가정은 미래에 쓸 돈까지 오늘 당겨 쓴 덕분에 마이너스 현금흐름을 보이게 되었다.
월급이 들어오면 지난달에 쓴 카드 값으로 몽땅 빠져나가다보니 일을 해도 즐겁지 않다. 월급날의 즐거움은 사라진 지 오래다. 예전에는 월급날이 되면 가족들과 기분 좋게 외식하거나 자녀들 장난감을 사주곤 했는데 어느새 그런 문화가 사라졌다. 월급 타봐야 카드 값으로 빠져나가버리니 월급날이 즐겁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 저금리로 저축해봤자 물가상승률보다 낮아 손해라는 생각도 한몫 거들었다. 예·적금 금리가 낮아지자 기대수익율이 높은 펀드로 이동을 했지만 수익률 하락으로 이마저도 중단해버렸다. 게다가 투자상품의 특성상 차근차근 돈을 모으는 상품이 아닌 자산증식을 위한 상품으로 인식되면서 매달 꾸준히 돈을 불입하기보다는 빚을 내서라도 한꺼번에 목돈을 불입하여 대박 수익을 기대한다. 저축은 돈이 천천히 모이는데다가 금리마저 낮으니 별로 재미가 없어 아예 안 하게 되는 것이다.
재미가 없다고 저축을 멀리하고 신용카드로 소비를 늘리는 사이 10년 전까지만 해도 20%를 상회하던 개인저축률이 1%대로 주저앉았다. IMF 직격탄을 맞은 직후인 1998년 23%였던 저축률이 작년에 2.5%까지 떨어지더니 올해는 1%대를 전망하고 있다. IMF 직후에도 20%가 넘게 저축을 했으니 단순히 경제가 어려워서 저축률이 줄어든 것이 아니란 이야기다.
신용카드와 마이너스 통장으로 쉽게 돈을 쓰고 투자를 통해 한 방에 큰 돈을 만들려다보니 저축의 개념 자체가 무너졌다. 저축해봐야 뭐하나 하는 생각에 결국에는 버는 돈을 다 써버린다. 심지어 지금 버는 돈 뿐만 아니라 미래에 벌게 될 돈까지 오늘 당겨서 써버린다. 미래에 돈 쓸 계획을 세워서 차근차근 모아도 모자란 마당에 미래에 벌 돈까지 오늘 써버리니 미래는 점점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돈이란 것은 벌어서 쓰고, 모아서 써야 하는데 요즘은 일단 쓰고 벌어서 갚는다. 먼저 쓰고 나중에 갚는 구조가 되다보니 인생 자체가 빚 갚는 인생이 되어버렸다. 퇴직하고 나서도 남는 건 자산이 아닌 빚일 것이 뻔하다보니 돈 버는 것이 즐겁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저축은 미래에 대한 계획과 준비저축의 기본 개념부터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저축은 이자놀이를 하기 위해서, 큰 부자가 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꼭 써야 하는 돈을 준비하는 것이다. 저축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게 한다. 올해 안에 냉장고를 교체해야 한다든지 내년에 새 집으로 이사를 가거나, 부모님의 회갑이나 칠순이 예정되어 있다면 목돈이 나가게 된다.
저축은 이렇게 미래에 써야 하는 돈에 대해 예측하고 목표를 세워 준비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목돈 지출을 저축이 아닌 신용카드나 마이너스 통장으로 해결한다면 그때부터 현금흐름은 악순환의 고리에 들어서게 된다. 가뜩이나 빠듯한 살림에 이자부담이 늘어나게 되고 늘어난 부담은 다시 생활비를 부족하게 만든다. 다시 신용카드와 마이너스 통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몰아가는 것이다.
흔히 무이자 할부를 이용하면 괜찮지 않느냐는 생각을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할부 자체는 무이자일지 모르지만 신용카드 할부를 이용하는 순간부터 할부 자체가 매달 상환해야 하는 고정비용이 되어 안 그래도 빠듯한 생활비를 축내고 결국엔 마이너스 통장에 손을 대게 만든다. 카드는 무이자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다른 금융비용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현금흐름이 불균형해지고 심리적으로도 불안해진다. 매달 돈을 벌고 쓰지만 모이는 것이 없다보니 돈에 대해서 조급해진다.
하지만 이런 목돈 지출을 저축을 통해 하나하나 해결한다면 이자를 내고 돈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이자를 받으면서 돈을 쓰게 된다. 당장에는 금리가 낮아서 저축으로 인한 효용이 별로 없는 것 같지만 인생 전체를 놓고보면 이자를 내고 사는 사람과 이자를 받으면서 사는 사람의 차이는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만약 1000만 원짜리 마이너스통장을 30년간 쓴다면 이자만 2000만 원이 훌쩍 넘는다. 배보다 배꼽이 큰 것이다. 이 이자 낼 돈으로 저축을 한다면 3600만 원을 모으게 된다. 쓴 돈은 겨우 1000만 원일지 모르지만 그 1000만원의 기회비용은 내가 쓴 금액의 3배가 넘게 된다(마이너스 통장 7%, 적금 4% 기준). 마이너스 통장 하나만 봐도 이 정도인데 저축 대신에 일상적으로 쓰는 신용카드와 약관대출, 할부금융 등으로 새나가는 돈까지 고려한다면 저축을 안 해서 치르는 대가는 생각보다 훨씬 크다.
저축은 가정의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