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기군.기존 4기군의 4각 깃발을 변형한 황기, 백기, 홍기, 남기를 추가하여 8기군이 완성되었다. 심양고궁에 있다.
이정근
홍승주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북경을 출발했다. 반란군을 진압한 홍승주는 한껏 고무되어 있었으나 따르는 병사들은 추웠다. 고비사막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에 떨고 있는 것이 아니라 팔기군 '괴담'에 떨고 있었다.
'번개처럼 빠르다'는 팔기군 '괴담'은 '귀신같이 나타나 목을 베고 바람처럼 사라진다'에서 '앞서가는 기병이 목을 치면 뒤따르는 기병이 땅에 닿기도 전에 주워간다'로 확대재생산 되었다. '괴담'은 들불처럼 번졌다. 그들은 팔기군 소리만 들어도 오싹하고 몸이 움츠러들었다. 홍승주는 '괴담' 바이러스에 감염된 부대를 이끌고 만리장성을 넘었다.
적진이 가까워올수록 '괴담'은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공포다. 멀리서 말 발굽소리만 들려도 피아를 가리지 않고 혼비백산했다. 그들은 싸워서 이기려는 군대가 아니라 공포 체험단이나 다름없었다. 분위기를 파악한 홍승주가 "괴담은 괴담일 뿐, 우리는 대륙에서 가장 강한 군대다"라고 휘하 장졸들을 독려했지만 공허했다.
노쇠한 곰이 탈진하기만을 기다리던 청나라는 기회는 이때다 싶었다. 고사 직전에 몰린 명나라를 그나마 받혀주고 있는 인물은 홍승주와 오삼계다. 이번 기회에 홍승주를 꺾어 놓으면 한쪽 날개가 부러진 황새. 명나라를 손아귀에 넣는 일은 시간문제다. 하지만 청나라는 성급하게 덤비지 않았다. 범문정의 지략이다.
병법 같은 것 모른다. 싸워서 이기면 되는 것 아닌가?만주벌판을 휘젓고 다니던 여진족은 치고, 부수고, 아작 내는 것이 특기다. 천하무적 팔기군을 거느리고 있는 홍타이지는 무얼 기다릴 것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럴 때마다 범문정이 제동을 걸었다. '조금이라도 힘이 남아있는 곰을 잡으려면 희생이 뒤따른다. 쇠잔하여 스스로 쓰러질 때 주어오면 힘 안들이고 거두어들인다'는 것이었다. 범문정이 이러한 논리를 펴면 격한 논쟁이 붙었다.
"오합지졸 명나라 군대가 무에 두려운가? 치고 들어가자.""손자가 병법에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다'고 했습니다.""손자병법이 무언가?""춘추전국시대 손무가 쓴 병서입니다.""우리는 병법 같은 것 모른다. 싸워서 이기면 되는 것 아닌가?""중원으로 나아가려면 만리장성을 통과해야 합니다. 산해관은 장성의 관문입니다. 누각에는 천하제일관이라는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관문을 강제로 열려고 하면 많은 희생이 따릅니다. 스스로 열어주는 문을 들어선 자가 진정 승리자이며 천하제일 강자입니다."범문정은 싱싱한 날고기만 먹는 호랑이가 아니라 죽은 고기도 먹어치우는 만주 벌판의 여우였다. 홍승주가 출정했다는 첩보를 입수한 청나라는 나아가서 싸우지 않고 유인했다. 함정으로 끌어들여 일거에 섬멸하겠다는 전술이다. 팔기군을 후방에 매복해두고 전투력이 약한 몽고군을 전방에 배치했다. 조선군은 보급부대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