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와 정순왕후. 드라마 <이산>.
MBC
의금부에서 홍국영과 마지막 작별을 하고 돌아온 정조 임금. '홍국영을 저렇게 만든 주범 중 하나는 바로 저 할머니'라는 생각에, 선을 분명히 긋고자 정순왕후(당시에는 왕대비) 처소를 찾았다.
할머니 처소에 왔으면 방안에 들어올 일이지 문밖에 서서 할머니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무례한' 손자 앞에서 정순왕후(정조보다 7세 연상)는 그저 쩔쩔매기만 한다. 이곳에서 노론도 움직이시고 홍 승지도 움직이셨느냐는 정조의 빈정거림에, 난 그저 주상을 위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했을 뿐이라고 정순왕후는 변명한다.
"날 위하는 것이라고요? 그냥 가만히 계셔주시는 게 저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셨습니까?" 뒤도 제대로 안 돌아본 채 정조는 그렇게 몇 마디 쏘아붙이고는 돌아갔다.
물론 실제의 정조 임금이 그렇게 무례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실제의 정순왕후 역시 그렇게 저자세를 취하지도 않았을 테지만, <이산> 제 67회(5월 6일) 초반부에 방영된 위의 장면은 정조와 정순왕후의 신경전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정조] "저 여자 안 보고 살 수 없나? 할머니만 아니었다면!"[정순] "어디 감히 날 따돌리려 해? 이 할머니를 어쩔 것이야!"정순왕후와 무관하게 살고 싶은 정조, 정조와 무관하게 살기 싫은 정순왕후. 두 사람의 갈등이 표출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바로 후궁 간택문제였다.
정조가 귀찮아하는데도 정순왕후는 여러 차례에 걸쳐 한글교서 등을 통해 정조의 후궁 간택문제에 개입하곤 했다. "어서 빨리 후궁을 취하라"는 것이 정순왕후의 주문이었다. 후궁문제는 정순왕후의 국정 개입에 좋은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정조 2년(1778)에 내린 한글교서에서 정순왕후가 후궁 간택을 재촉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정조의 여성 취향에 대해서까지 이렇다저렇다 평을 했다는 점이다. 안 그래도 정순왕후를 못마땅해 한 정조 임금이 그 한글교서를 보고 속으로 얼마나 짜증이 났을까?
정순왕후 "정조는 미천한 사람은 취하려 하지 않는다"
<정조실록> 정조 2년 5월 2일자 기사에 정순왕후의 교서가 수록되어 있다. 본래의 교서는 한글로 작성되었지만, 실록에는 한문으로 번역되어 있다. 한문 번역 과정에서 뉘앙스의 변화가 생겼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400년 종사가 오로지 주상의 한몸에 의탁하고 있는데도 춘추가 거의 30에 가깝도록 종사(螽斯, 자손 번창)의 경사가 아직도 늦어지고 있다(四百年宗社之托惟在主上一身而春秋幾近三十螽斯之慶尙今晼晩)"고 우려를 표명한 정순왕후는
"주상 역시 이를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별달리 마음을 두고 있지 않다(主上亦已諒此特不關念)"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그리고는 정조의 여성 취향에 대해 바로 다음 대목에서 이렇게 평했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아래 문장에 "볼 때에"라는 어휘를 추가했음을 밝혀둔다.
"그런데 궐내 궁인들이 어찌 많지 않다고 하겠는가마는, 주상은 그 본래의 성심으로 볼 때에 미천한 사람은 취하려고 하지 않는다."(而闕內宮人豈曰不多主上本來之聖念至於微賤處不欲其有)이에 따르면, 궐내에 많고 많은 궁인들을 취해서라도 자식을 낳으면 되는데도 주상이 그런 여자들에게는 눈도 돌리지 않는다고 정순왕후는 평하고 있다. 주상이 미천한 여자에게는 별로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눈높이를 조금만 낮추면 되는데 왜 그걸 못하느냐?'는 생각이 담긴 말이다.
신분이 낮은 궐내 궁녀들에 대해 정조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정순왕후의 평을 들으면, 드라마에 나오는 정조와 성송연(의빈 성씨, 이름은 알 수 없음)의 관계가 갑자기 의아해질지도 모른다. 드라마 속의 정조 임금은 사랑 하나로 얼마든지 신분을 극복할 수 있는 남자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교서가 발표된 시점은 정조 2년(1778) 5월 2일이고 정조와 의빈 성씨가 첫날밤을 가진 시점은 정조 5년 11월 중순(1782년 1월 초) 이전 시점이므로, 3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정조의 생각이 달라졌을 수도 있고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궁녀 출신의 성씨가 정조와 첫날밤을 가지기 몇 년 전에 위의 교서가 나왔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정순왕후의 말처럼 본래의 정조 임금은 미천한 궁녀들에게 정말로 눈도 돌리려 하지 않는 사람이었을까? 그는 과연 '조건'을 따지는 남자였을까?
정조는 정말 '조건'을 따지는 남자였나남인·서얼·노비 등 사회적 소외계층에게 관심을 베푸는 한편 그들을 제도권에 끌어들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을 기울인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다른 군주들과 비교할 때에 정조는 그다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역대 왕들과 비교할 때에 정조는 분명히 인간평등의 이념에 조금은 더 가까이 다가선 인물이었다.
물론 그가 유교적 신분제 사회를 옹호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속에서도 그는 새로운 사회를 지향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사회적 소외계층에게 관심을 베풀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에, 정조가 단지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만으로 궁녀들을 무조건 배척했으리라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일단 외형적으로 나타난 것은 초기의 정조가 궁녀들과의 접촉을 꺼렸다는 점이다. 그들 중에서 후궁을 맞아들이는 데에 대해 소극적 태도를 보인 것만큼은 사실일 것이다. 그럼, 그는 왜 그렇게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