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이산>.
MBC
요즘 <이산>을 이끌어가는 흐름 가운데에 하나는 ‘후궁 간택’이라는 사안이다.
장태우의 등장과 역병의 창궐로 인해 정조가 위기에 빠진 상황인데도 혜경궁 홍씨는 후궁 간택을 서두른다. 이런 상황일수록 후궁 간택을 빨리 서두르는 게 정치적 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그의 논리다. 그리고 혜경궁이 적극 추천하는 후보는 홍국영의 누이동생(훗날의 원빈 홍씨)이다. 같은 홍씨라고 팔을 안으로 굽히는 걸까?
그런 시어머니에 맞서 효의황후도 독자적 움직임을 전개한다. 성송연 때문에 은근히 가슴앓이를 해온 그는 시어머니가 홍국영의 여동생을 적극 후원하자, 뜻밖에도 성송연을 새로운 ‘내 남편의 부인’으로 적극 추천함으로써 시어머니의 드라이브에 제동을 걸려 한다.
송연이만큼 내 남편이 의지할 여자가 없으며 실세 홍국영이 군주의 처남까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논리이지만, 어찌 보면 이이제이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또 어찌 생각하면, ‘내 남자의 여자’를 하나라도 줄여보자는 심산은 없었을까? 홍국영의 동생이 후궁이 되면 ‘내 남자의 여자’가 1명 더 추가되는 것이지만, 송연이가 후궁이 되면 그 숫자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다. 물론 착하디착한 효의황후가 그런 생각까지야 했을까?
이 같은 드라마 상황을 놓고 보면, 송연이는 혜경궁과 효의황후 간의 알력 구도 하에서 효의황후의 라인에 섰다는 말이 된다. 홍국영의 여동생을 내세운 혜경궁을 꺾기 위해 효의황후가 뽑아든 대항 카드가 바로 송연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럼, 성송연의 모델인 의빈 성씨(~1786년)를 둘러싼 실제 상황은 어떠했을까?
성송연은 효의왕후 '라인'? 결론부터 말하면, 의빈 성씨는 어느 한편에 선 적이 없으며 홍국영과도 대립한 적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사료상으로는 그렇게 판단된다. 아래의 세 가지 근거가 그런 결론을 뒷받침한다.
첫째, 성씨가 후궁이 된 시점은 홍국영이 죽은 뒤였다.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성씨는 홍국영이 죽은 이듬해인 1782년에 정3품 소용(후궁의 8등급 중 5단계)이 되었고 다음 해인 1783년에 정1품 빈(1단계)으로 승격되었다.
이 점을 본다면, 그는 홍국영의 누이인 원빈 홍씨(1779년 사망)와 홍국영(1781년 사망)이 모두 죽은 뒤에야 비로소 후궁의 자리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가 후궁이 되는 과정에서 홍국영 측과의 알력이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