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전 여의도 렉싱턴호텔에서 박형규 목사, 백낙청 서울대 교수, 함세웅 신부(왼쪽부터) 등 재야 사회원로들이 후보단일화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유성호
"사실상 대선은 끝났다."
"암흑의 시기가 올 것 같다. 앞으로 5년 동안 해가 뜰까?"
"이명박, 이회창 중에 누가 되는 게 날까?"대선이 오늘로 꼭 한달 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여기저기선 냉소와 패배어린 말들이 심심치 않다.
잠시 접고 보자. 여론조사? 흔들리는 이명박 표가 정동영, 문국현, 권영길쪽으로 넘어오지 않는다. 후보 단일화? 해도 20% 수준이란다. 자체 동력으로 어찌해볼 수 없는 상태 아닌가? 대선 마지막 변수라며 다들 'BBK 김경준' 입만 바라보고 있다. 여론조사니, 검찰이니 수치와 팩트의 마술에서 벗어나 한번쯤 '빈 마음'으로 대선을 보자.
19일 열린 사회원로 기자회견을 지켜보며 문뜩 '낙관'을 떠올렸다. 새로운 논리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말하는 자의 힘 때문이었다. 낙관은 차분하고 조용히 찾아왔다.
오전 10시 30분 여의도 국회의사당 건너편 모처에서 박형규 목사(85), 백낙청 교수(70), 함세웅 신부(66)가 자리를 함께 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관통해온 진보 진영의 원로들이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권의 흥망사를 몸으로 기록해온 인물들이다.
'민주개혁세력의 패배주의 극복과 후보단일화 촉구 사회원로 기자회견.' 이들이 내건 회견 제목이다. 목에 힘준 구호도, 면면의 배석자들도 없었다. 정해구 교수(성공회대 정치학)가 사회를 보는 정도였다. 백낙청 교수는 "민주개혁세력이 패배주의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다각도의 논의가 있지만 일단 원로라고 하는 나이 든 우리들이 분명한 입장을 밝히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취지를 설명했다.
"아직껏 상식과 몰상식의 대립구도 유효" A4 2장 분량의 회견문 초안은 백낙청 교수가 작성했다. 문학도의 언어로 표현하는 2007 대선의 구도는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 사회에는 아직껏 상식과 몰상식의 대립구도가 유효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사회악과 냉전적 사고를 극복하기 위해 그동안 한국의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많은 이들이 열정적으로 헌신해왔고 이만큼이나마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우리는 절감합니다. 지금이야말로 민주개혁세력이 한 번 더 분발하여 상식의 지배영역이 넓어지는 미래를 확정지을 때입니다."
박형규 목사는 특히 성명서에서 "정교하고 효율적인 정치공학을 통해 최대한의 세력연합을 달성하는 것이 민주개혁세력이 역사 앞에 책임져야 할 임무"라는 표현에 주목했다. "나라의 전진을 바라는 사람들이 정치인들에게 요구하는 바를 간단명료하게 집약했다"고 평가했다.
힘을 보태라는 주문이다. 선거연합이든, 합당이든, 또 어떤 방식이든. 민주당에겐 "지역기반을", 통합신당에겐 "의원들의 힘을", 문국현 후보에겐 "정책과 인력의 참신성을", 민주노동당을 향해서도 "독자적인 민중조직을 지닌 집단 역시 힘을 보태는 방법을 강구하라"는 것이다. 방법? 정치인들이 할 일이다.
백 교수는 '정치공학'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했다. 아니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정치공학의 본래 의미를 찾아주었다.
"정치공론을 왜곡하는데 활용되는 단어가 되었어요. 집의 설계도가 아무리 좋아도 구조공학의 뒷받침 없이는 안됩니다. 현실정치에서 공학이 없으면 안되죠. 세력을 키우려면 공학을 해야 합니다. 엔지니어들이 공학을 다루잖아요? 우리는 여기까지 하고 정치인들이 집을 잘 지어주어야 합니다."
함세웅 신부는 기도하는 심정을 드러냈다. 함 신부는 "나는 옆에 계신 박형규 목사와 백낙청 교수를 모시고 35년 가까이 민주화와 인권 회복을 위해 함께 일해 왔다"며 운을 뗐다.
"대선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바른 가치를 지녀야 합니다. 성경에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정의를 구하라. 그러면 모든 것을 저절로 얻을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을 톨스토이가 <부활>에서 인용하고 있지요. 하늘나라와 정의를 구하지 않고 덤으로 보장된 것을 찾다간 부정과 부패에 매몰된다는 것을 톨스토이가 지적하고 있습니다."
덤! 총선을 염두하고 지분을 따지는 세력과 대선을 선전장으로 삼는 세력에 대한 꾸짖음이다. 백 교수는 "우리가 성명서를 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민주개혁을 표방하는 정당과 사람들이 패배주의 젖어서 총선을 바라본다던가, 실리를 따지지는 않아도 대선공간에서 자신들의 가치를 선전하는 장으로 활용해 패배연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 명의 원로는 낙관했다. 당위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박형규 목사는 다시 기적을 말했다.
"그랜저를 타는 세력들이예요. 차가 크면 클수록 왕창 부서질 가능성이 높아요. 작은 차를 타던 사람들은 오래 타다보니 낡고 부품도 갈아야 되는 상황이 된 거예요. 하지만 작은 차는 수리도 쉽고 속도를 내면 빨리 달릴 수 있어요. 한국은 항상 기적을 통해 발전해 왔습니다."
"후보 단일화가 되면 민주개혁세력은 성공합니다. 역사는 진전하지 후퇴하지 않아요. 30, 40년 민주화 열정 되살아날 것이라 봅니다. 자신감과 확신을 갖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함세웅)
"저도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 봅니다.(백낙청)
회견장에 늦게 도착한 김병상 신부는 "우리가 결실을 이뤄내지 못하면 그동안 죽고 감옥에 가고 눈물 흘린 많은 사람들에게 할 말이 없다"며 "노무현 정부가 다른 건 잘했더라도 제일 잘못하는 것을 지적하라면 민주화 정부를 이어주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끝을 내고 말았다는 결과를 낸다면 역사 앞에 그 죄를 용서받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국민, 마취 상태에서 깨어날 것이라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