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에 복원된 광통교이정근
"광통교의 흙다리(土橋)가 비만 오면 무너지니 청컨대 정릉 구기(舊基)의 돌로 돌다리(石橋)를 만드소서?"- <태종실록>
의정부에서 상언이 올라왔다. 정동에 있는 신덕왕후 강씨의 능침에 병풍석과 신장석으로 사용된 석물을 해체 운반하여 돌다리를 만들자는 것이다. 의정부의 이름을 빌렸지만 왕심(王心)을 읽어 내는데 천재성을 발휘하는 귀재의 복안이었다.
신덕왕후 강씨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 이성계는 웅장한 능침을 조성하라고 감역제조(監役提調) 김주에게 명했다.
"정릉과 요물고(料物庫)를 빨리 만들 필요는 없으나 사리전(舍利殿) 건축은 내가 원한 지가 오래 되었는데 지금 일을 마치지 않으면 후일에 이를 저지(沮止)시킬 사람이 있을까 염려되니 빨리 성취하여 나의 소망에 보답하라."
먼저 간 부인에게 바치는 사부곡
산릉의 능침사찰로 흥천사(興天寺)를 짓고 사리전(舍利殿)을 지으라는 것이다. 그것도 자기대가 아니면 중지 시킬 수 있으니 빨리 서두르라는 것이다. 이 때 태조 이성계가 사찰 공사를 저지시킬 수 있는 자로 지목한 사람은 이방원이었다.
이방원이 아무런 직책이 없는 야인으로 권력의 변방에 서성거리고 있지만 그의 야심을 잘 알고 있었다. 유학을 공부하여 성리학을 숭상하고 있는 이방원이 언젠가 왕위에 오르면 불교를 배척하리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덕왕후 능침과 흥천사 공사에 속도가 붙었다. 태조 이성계 곁에 항상 붙어 다니던 환자(宦者) 김사행이 잔재주와 아첨을 떨어 능침과 흥천사가 호화롭고 사치스럽게 완공되었다.
당대 최고의 석공을 동원하여 조각한 화엄신장을 둘러싼 구름무늬가 있는 병풍석은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덩굴무늬를 아로새긴 열두 개의 돌은 태조 이성계가 먼저 간 신덕왕후 강씨에게 바치는 사부곡(思婦曲)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