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몬트 주 입성을 알려주는 표지판. 국도라서 그런지 큰 표지판 하나 없이 단촐하기만 하다.문종성
5월 21일. 조그만 표지판만이 버몬트 입성을 말해주고 있었다. 14번 국도를 따라 북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이 주(州)의 유일한 중소도시 벌링턴(Burlington)으로 가기로 했다. 마침 오전부터 내가 가는 길 옆으로 강이 하나 흐른다. 화이트 리버(White river)는 도로 지도에도 아주 작게 표시되어 있을 만큼 그 존재가 미미한 강이지만 나에게는 한 줌의 희망과도 같은 것이었다. 적당히 거친 물살에 맑은 수질, 그리고 강 가 쪽으로는 그리 깊지 않은 수심이 오늘의 샤워 걱정을 덜 수 있게끔 확신을 준다.
'야호! 오늘은 이곳에서 텐트를 치는 거야. 신나게 물장구 한 번 쳐보자고!'
그리하여 들뜬 기분으로 버몬트 내륙을 향해 거침없이 들어갈고 있을 때였다. 한 가정이 자기 집 뜰에서 한가로이 저물어 가는 해를 인테리어 삼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순간 생존을 위해 민첩하게 반응하는 여행자의 오감은 보이지 않는 그 어떤 알 수 없는 기운으로 인해 심하게 흥분되었다. 이들의 환영은 호기심에 그들의 뜰로 불쑥 들어가 인사를 건넨 다음에야 한 박자 늦게 이뤄진다.
무작정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날씨 참 좋군요. 게다가 이 버몬트는 온통 초록빛이 감도는 자연경관이 너무 아름다워서 자전거를 타는데 별로 힘들지도 않아요. 와우~ 정말 멋진 길인데요!"
묻지도 않았는데 일단 이 곳의 칭찬부터 늘어놓는다. 그래도 이 정도면 아부성 발언이 아닌 사실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가족 중에 할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끄덕이며 대꾸한다.
"허허, 그래요? 이곳 자연이 좋긴 좋죠. 시원하고 도시처럼 빡빡하지도 않고. 그런데 자전거라니, 당신 체력이 참 좋은가 보군요."
"아니에요. 몸 상태에 따라 주행거리를 조절하니 체력은 크게 문제되지는 않아요."
"피곤하지 않아요? 아, 마침 우리 소시지를 해서 먹으려던 참이었는데 혹시 저녁 식사 했어요?"
이번엔 그의 아들이 대화에 끼어들어 나의 상황을 파악한다.
"식사요? 안 했죠!"
이래서 가끔 지성보다는 감성이 무서운가보다. 지나갈 때 그 집의 기운이 어째 심상치 않더니만 마침 불고기를 구우려던 참이었다니…. 그의 집은 레이먼드(Raymond) 가(家)였고 방금 대답한 아들의 아내는 임신 9개월 중이었다.
"다음 달이면 애가 나와요. 딸이래요."
배가 불룩해진 그녀의 배를 쓰다듬은 그의 손이 무척 다정하고 따뜻해 보인다. 그런 날이 있었다. 달님도 사라지고 별빛만으로 세상을 비추던 밤, 텐트 안에 누워 김수지의 '아가에게'라는 가스펠 노래를 듣다가 그만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 적 말이다. '나에게도 아버지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게 다가올까? 내 친구들처럼 주위 어른들처럼 그 경외감과 감동을 나 역시 맛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의 끝에는 괜스레 아버지로는 아직 여러모로 준비가 덜 됐다는 자책감에 그만 멀건 유리 방울을 내보냈던 것이었다.
"축하해요."
그 짧은 한 마디에도 진심과 부러움이 정제되지 않고 그대로 표현된다. 시골에서 3대가 함께 사는 것을 보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보통의 경우 자식들은 도회지에서 직장에 다니고 노인들은 은퇴 후 연금으로 살아가는 경우를 많이 봐 왔기 때문이다. 그들의 집에는 열이면 아홉은 대개 자식들의 사진을 냉장고에 여기저기 붙여놓고 자랑 아닌 소개를 하곤 한다. 그래서인지 레이먼드의 가족은 독특하면서도 굉장히 화목해보였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하고 싶은 말이 영어로 떠오르지 않아 미안해하며 말했다.
"미안해요. 내가 말하려는 게 영어로 잘 생각나지가 않아요. 사실 영어를 잘 못해서 말이죠."
그 때 레이먼드의 부인이 남편에게 장난스러운 얼굴로 넌지시 물었다.
"당신은 한국말 할 줄 알아요?"
"아니."
레이먼드는 장난치듯 대꾸했다.
"우린 한국말을 아예 못하잖아요. 그래도 당신은 영어가 그 정도면 굉장히 좋은 편이에요. 오히려 우리가 더 미안한 걸요."
그들은 유머러스하게, 손님이 무안해하지 않게, 그리고 진심으로 괜찮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