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96회

등록 2007.05.16 08:23수정 2007.05.16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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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槍)은 검(劍)이나 도(刀)와는 달리 베는 것이 아니고 찌르는 것이다. 더구나 일정공간을 유지해야 그 묘용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무기다. 따라서 창을 상대할 때는 전후(前後)로 움직임보다 좌우(左右)로 움직이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무엇보다 좌우로 움직이면 상대 창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쉽고, 창끝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틈을 파고들어 상대와의 거리를 좁히고 방위를 선점한다면 창은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허나 무적신창이라 이름 붙은 좌등의 창은 아예 그런 일반적인 상식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마치 창끝에 눈이 달려있는 듯 그 길이가 좌우자재로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창의 중간까지도 손잡이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창이 단지 찌르는 것만이 아니라 베는 효용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실전감각이 무디어져 몸을 풀기 위해 누구에게라도 사정을 하려 했는데… 너무 좋군."

좌등은 갑자기 공세를 늦추었다. 갑자기 생각을 바꾼 것 같았다. 덩치에 맞지 않게 몸의 움직임은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민첩했지만 날카롭고 치명적인 공격이 아닌 이번이 감당할 정도의 공격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좌등은 이 싸움을 즐기고 있는 듯 보였다. 아마 그의 말대로 광나한과의 숭무지례를 대비한 몸을 푸는 상태로 생각한 것 같았다.

"기분 더럽군."

처음에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약간의 여유를 주자 금방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부상을 입어 부자연스러웠던 몸놀림도 매끄럽게 변하고 있었다. 좌등의 창을 피하기 급급한 듯 보였지만 가끔 날카롭게 화령지로 반격을 하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은 것 같았다.


오히려 급박하게 변한 쪽은 진운청과 진번의 싸움이었다. 진번은 이미 너덜거리는 오른손은 사용할 수 없었지만 장력을 발출할 수 없다는 것뿐이어서 팔목 위서부터는 사용할 수 있었고 왼팔과 두 다리를 최대한 활용하여 진운청과 대등한 형국을 이뤄내고 있었다.

진번이 이 정도로 버틸 수 있는 것은 진운청의 검로가 매우 단조롭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상대의 눈을 속이는 허초(虛招)도 없었고, 현란한 변식(變式)도 없이 그저 찌르고, 내리치며, 횡으로 베는 것이 고작이었다.


사실 검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초식은 모두 그 세 가지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것을 조금 초식다운 형식으로 바꾸어 선인지로(仙人指路)니, 태산압정(泰山押頂)이니, 횡소천군(橫掃千軍)이니, 팔방풍우(八方風雨)이니 하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놓았지만 모든 검식이 어쨌든 이것을 벗어나는 일은 없다. 다만 그 세 가지 형(形)과 운용하는 식(式)에 변화를 주고, 빠르기의 조절로 새로운 검식이 되는 것이다.

무림인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이 안력(眼力)이다. 상대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고 예상할 수 있는 능력이 안력이다. 그래서 무림인들은 안력을 높이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안력이라는 것이 일이년 만에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풍부한 실전경험을 쌓아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노회함이란 것도 일부분은 바로 이런 경험을 말하는 것일 밖에….

당연히 눈에 뻔히 보이는 그런 수법으로 당할 상대는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진운청은 초식이 전혀 필요 없는 전장에 나선 군졸과 같이 우직하게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것이다. 도대체 진운청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다른 아무런 검초조차 익히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허나 진번의 생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졌다. 쉽게 생각하고 몇 번 공격하다 위급한 상황을 맞이한 후에 바뀐 생각이었다. 아주 간단하고 눈에 뻔히 보이는 검로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공격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기 때문이었다.

눈에 뻔히 보이는 공격인데도 반격할 결정적인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 이상한 일이었다. 오른쪽 장(掌)을 파괴되어 오른팔을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또한 숨 돌릴 틈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 때문에도 반격할 틈을 가지지 못했다. 누군가 옆에서 보고 있노라면 화려함이나 멋 따위와는 거리가 먼 마구잡이식으로 공격하는 진운청을 처리하지 못하는 진번이 답답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스스로도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지? 사람 말려죽일 셈인가?'

언제나 똑같은 속도와 눈에 뻔히 보이는 검로였다. 그럼에도 초식을 교환할수록 단 한번의 완벽한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지만, 결코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치명적인 공격을 하는 것도 아니어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수십 초가 지나면서 두 차례에 걸쳐 위기를 맞기는 했지만 맹렬하게 반격하면 슬며시 물러나는 것이 더욱 답답할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승부를 보려면 수백초가 흘러야 할 것 같았다. 간혹 이런 무림인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다. 특별한 절기(絶技)도 아니면서 수비에 치중하여 상대가 실수하는 순간 끝내버리는 인물이 있다는 것을… 그런 인물들은 절대 실수를 하지 않고 상대의 허점이 보이는 순간 끝나 버린다고 했다.

'일단 벗어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의 직감은 자꾸 경고하고 있었다. 이런 경우 상대에게 맹렬히 공격한 후에 몸을 빼내는 것이 상책이었다. 일은 이미 틀렸다. 은밀하게 움직여야 함에도 이미 상대는 함정을 파놓고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이 걱정스러웠지만 자신의 한 몸 빼내는 것이야 어려울 것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틈을 보아 맹렬히 공격하면서 들어왔던 창문으로 튈 생각이었다. 마침내 기회는 왔다. 진기를 십성(十成)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벽력장 중 가장 위력이 크다는 벽벽진천(劈霹振天)을 단숨에 삼장을 뻗으며 공격했다. 비록 한 손이었지만 그 위력은 정말 벽력을 내뿜어 천지를 진동한다는 이름에 걸맞게 위력적이었다.

진운청도 이때만큼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똑같은 초식이었지만 갑작스럽게 검이 몇 개로 분리되는 듯싶더니 팔방풍우와 선인지로처럼 보이는 초식을 동시에 펼쳐냈다. 한 순간에 검이 수 개로 분리되는 듯 허공에 빽빽한 검화(劍花)를 피어 올리며 사방으로 비산되었다. 동시에 다섯 군데의 요혈을 노리고 찔러가는 공수를 겸비한 초식을 펼쳐내자 진번은 또 한번 진운청이 범상한 검수가 아님을 느꼈다. 자신의 이번 삼장 공격으로 진운청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부상을 입히거나 최소한 몸을 빼낼 시간적인 여유가 충분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몸을 빼낼 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맹렬하게 공격한 후에 짧은 순간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들어온 창문으로 신형을 날렸다. 헌데 이상한 것은 진번이 그쪽으로 몸을 날리자 진운청이 쫓아갈 생각은커녕 오히려 공격까지 멈추는 것이 아닌가?

퍼---펑---!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것은 진번이 창문을 나서는 순간 그 이유가 바로 밝혀졌다. 가죽북 터지는 소리가 들리며 진번의 신형이 실 끊어진 연처럼 다시 창문 안으로 날라 들어와 바닥에 처박혔기 때문이었다.

"어억--- 우엑----!"

널 부러진 진번의 입에서 피 화살이 터졌다. 상체를 일으키려고 애썼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진번이 되돌아 온 창문에 걸터앉은 와룡장 모가두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이미 밖에서 지키고 있었던 듯싶었다.

"비… 비겁한 자식… 우엑… 비겁하게 기습을 하다니…."

피를 토하면서 진번이 힘겹게 부르짖었다. 허연 조각들이 피에 섞여 나오는 것을 보면 이미 내장이 심하게 상한 듯 했다. 얼굴색 역시 이미 허옇게 변했다가 검붉은 색이 보이고 있었다. 갑자기 모가두가 대소를 터트렸다.

"홧홧홧… 비겁하다고? 물론 비겁하지. 헌데 어둠 속에 세시진이나 몸을 감추고 있다가 운공 중인 사람을 암습한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안 그런가? 불알 없는 놈의 비위나 맞추는 네놈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모욕이었다. 진번이 가장 듣기 싫은 소리가 '불알 없는 놈의 사타구니나 핥아 주는 개'라는 소리였다. 그것보다는 점잖게 표현했지만 다를 바 없었다.

"우엑-----! 이… 죽일 놈… 네 놈은… 우… 흑…."

기도가 막힌 것 같았다. 그 뒤의 말은 알아듣기 힘들었다. 피가 꾸역꾸역 코와 입으로 밀려나오며 끄륵 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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