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83회

등록 2007.04.27 08:16수정 2007.04.27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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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절룩거리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 그가 다쳤거나 하기 때문에 절룩거리는 것은 아니었다. 선천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어려서 사고를 당한 이후로 한쪽 다리가 제대로 발육하지 못해 다른 쪽보다 약간 짧았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깝게 만드는 그의 걷는 모습은 그를 모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매우 황당한 오해를 하게 만들곤 했다. 그는 절대 위험하지 않아 보였고, 오히려 측은한 마음이 들게끔 만들었다.

허나 그를 알게 되면 그를 만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운이 좋은 일인지 알게 된다. 그를 알게 된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그리고 얼마나 빠른 사람인지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리가 불구라 해서 경공을 펼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의 고정관념에 불과했다.

그가 경공을 펼치면 너무나 빨랐고, 그것도 뻔히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또한 주위의 이목을 피하겠다고 마음먹는다면 피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허나 그는 전혀 경공을 펼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주위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았다. 그는 청룡각을 나온 이후 곧바로 서북쪽을 향해 느릿하게 절룩거리며 걸어갔으며 그가 도착한 곳은 운중보 내에서는 유일한 귀산 노인의 모옥이었다.

그는 절룩거리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마치 자기 집을 들어가듯 모옥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황촉불이 타오르고 있었는데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 모옥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


그는 청각을 기울여 주위에 누군가 있는지를 살폈지만 감지할 수 없었고, 탁자 옆 의자에 앉았다. 그가 듣기로 귀산 노인은 보통 외출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어두워지면 대개 모옥에 있다고도 했다. 그런데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기다리기로 했다. 미동도 없이 앉아서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이 할 일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면 반드시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무섭고도 철저한 사람이었고, 그것으로 인해 불구임에도 윗사람이 가장 신임하는 수하가 되었다.


그는 팔번 중 첫째인 건번(乾幡)이었다.

------------

철기문의 문주 옥청문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자신의 형을 시해한 자들은 바로 운중보 내에 있었다. 과정에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스며들어 있었지만 조사한 바대로 분명 동창에서 형을 시해했다. 하지만 과연 경첩 형의 말대로 단지 신 태감이 추 태감에게 과잉충성하기 위해 비영조를 시켜 형을 시해하도록 명령을 내린 것일까?

신 태감의 위세가 적지 않았다 하더라도, 철담이 죽어 네 명뿐인 동정오우라 할지라도 그들을 적으로 돌리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다. 그 역시 이미 지천명(知天命)이 지난 세월 동안 살아오면서 얻은 경험과 지식은 그의 머리를 가로젓게 했다.

그렇다면 왜 경첩 형을 시켜 그런 말을 전하도록 했을까? 일단 결론은 하나였다.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다. 자신의 손을 빌려 이미 쓸모없어진 두 놈을 없애려는 것이다. 오히려 형의 시해사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두 놈이 떠들고 다닐지 모르니 자신의 손으로 입막음을 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허나 단지 그 이유뿐일까? 도대체 추 태감이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 그 두 놈을 없애려고 움직이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아주 복잡한 문제가 잠재되어 있었다. 차라리 그 두 놈이 추 태감의 손에 있고, 자신보고 몰래 해치워 달란 다면 간단하다.

지금 상황은 그것이 아니었다. 추 태감은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두 놈을 없애달라는 것에 다름없었다. 그것도 지금 보주가 전권을 주고 사건을 조사해 달라고 부탁한 함곡과 풍철한 일행에 합류되어 있는 놈들이다. 그들을 데려오거나 없애려면 함곡과 풍철한 일행과 부득이하게 손을 섞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어쩌면 보주와 등을 돌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혈간이 죽었다하더라도 아직 보주 후계를 옥기룡이 이어야 한다는 욕망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혈간의 희생 때문이라도 반드시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보주와 적이 될 수는 없었다.

한편으로는 추 태감이 내민 손을 뿌리치기에도 문제는 있었다. 지금 자신이 데리고 있던 두 놈을 처리하든 마음대로 하라는 것은 철기문에게 손을 내민 것과 다름없었다. 그것을 매몰차게 뿌리친다면 추 태감과 적이 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었다.

옥청문은 지금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선택이 아닌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도 어느 한쪽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을 놓고 마지못해 해야 하는 선택을 말이다.

"반드시 소인 손으로 그 두 놈의 목을 따겠습니다."

주인이 망설이는 듯 벌써 이각이나 침묵을 지키자 단혁(亶爀)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단호한 목소리를 발했다. 마음속으로야 이미 밝혀진 흉수 놈을 처리하는 것에 뜸을 들이는 옥청문에 대해 불만은 있었겠지만 감히 그것을 표출하지는 못하고 옥청문이 허락한다면 당장이라도 움직일 듯한 기세를 보임으로서 옥청문의 결단을 촉구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옥청문은 그 두 놈이 문상을 온 사이에 그들을 발견한 진삼(秦三)이 그 시각에 살해되었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누군가 그들을 도와주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였다. 도대체 누가 그들을 도와주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누구와 관계가 있는 것일까?

"아버님… 소자와 단각주가 움직인다면 조용히 일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아예 정당하게 함곡에게 두 놈을 내달라고 요청하면 어떨 런지요?"

아니었다. 두 놈이 백호각에 기어들어왔는데도 그것을 처리하지 못했다. 더구나 이미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있었다고는 하나 형님을 시해할 정도라면 쉽게 처리할 수 없는 놈들이다. 반드시 죽여야 할 놈들이지만 지금은 시기가 아니다.

생각에 잠겨있던 옥청문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표정들로 보아서 자신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유일하게 동생인 옥청량 뿐이다. 문파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 단지 힘으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힘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주위의 많은 문파와 인물들과의 타협과 조화다. 제거해야할 상대와 타협해야할 상대를 정확히 구분할 수 있어야 문파를 이끌어 나가는 수장(首將)이 되는 것이다.

옥청문은 숨을 길게 불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강요된 것이지만 선택은 해야 한다. 아이들은 이미 불만의 싹을 틔우고 어떤 짓을 벌일지 모르는 상태다.

"아직 움직이지 않는다. 시간은 충분하다."

그 말에 옥기룡은 노골적으로 불만스런 표정을 나타냈고, 단혁은 불충을 이유로 고개를 숙였지만 분노를 참을 수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버님!"

"먼저 움직이면 당한다. 지금 이 안에 있는 인물들의 면면을 보아라. 누구 하나 이 애비에 뒤지는 자가 있느냐?"

"……!"

"흔들어 대는 것이다. 추 태감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누군가 놓기 바라는 것이다. 그 활시위가 누구를 향하든 그것으로 인해 팽팽한 균형이 무너지기를 바라는 것이고, 그 활시위를 놓는 자가 우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버님. 그렇다 해도 그 놈들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이다."

옥청문은 의외로 고개를 끄떡였다.

"단각주는 수하들과 함께 움직인다. 단! 현무각으로 들어가거나 함곡 일행과 부닥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그 두 놈들이 따로 움직인다면 공격해도 좋다. 사로잡으려 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두 놈을 사로잡는다 해도 알아낼 것은 거의 없을 테니까. 다시 한 번 경고하건데… 절대 그 두 놈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과 부닥치는 없어야 한다. 만약 그 두 놈을 돕기 위해 누가 나선다면 그 자리를 피해라. 명심해라."

"알겠습니다. 주인어른."

내심 불만은 있었지만 단혁은 이만한 정도로 허락해 준 옥청문에게 감사했다. 그 두 놈은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목을 따야 했다. 그것이 자신을 인간답게 만들어 준 혈간 어른에 대한 예의이고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눈짓과 더불어 정중하게 예를 취하고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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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똑똑한 사람이 충분한 시간을 두고 짠 완벽한 계획이라도 그 계획대로 완벽하게 진행되지는 않는다. 인간에게는 언제나 계산할 수 없는 변수(變數)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인간은 때때로 감정에 휩쓸리거나 돌발적인 행동을 저지르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로 인하여 완벽한 계획에서 조그만 틈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다만 벌어지기 시작한 틈을 깨달았다면 어떻게 메우느냐 하는 문제보다 그 벌어진 틈을 어떻게 유리하게 이용하느냐하는 것이 현명한 자가 택할 행동이었다.

이렇게 세 번째 날이 흐르고 있었다.

(제 3권 完)

덧붙이는 글 | 오늘로 3권이 끝났습니다. 밤이 깊지 않은데…. 삼일째 밤 사건들은 또 4권으로 넘겨야겠군요. 애독해 주시는 독자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오늘로 3권이 끝났습니다. 밤이 깊지 않은데…. 삼일째 밤 사건들은 또 4권으로 넘겨야겠군요. 애독해 주시는 독자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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