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공민왕 3년(1354년)때의 노비문서. 이 문기에는 해남윤씨가의 중시조인 광전의 처가 시집올때 데려온 노비를 자식에게 물려준다는 문서로 당시 남녀가 똑같이 재산을 분배받았음을 알 수 있다.녹우당
해남윤씨가의 재산경영 스타일은 어떤 것이었을까? 당시 성리학을 신봉하는 집안에서 오늘날처럼 이윤을 중요시 여기는 경제 논리를 적용하기 어려웠겠지만 집안에 내려오는 가훈과 문서들을 통해 보면 근검절약과 적선을 강조하는 지극히 유교적 이념을 실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해남윤씨가의 재산이 이처럼 막대하게 늘어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고려 말 조선중기까지도 실시되었던 '남녀균분제'의 재산상속 시스템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7세기 무렵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남녀가 똑같이 재산을 나누어 가지는 '남녀균등분배'의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였다. 그러나 장자에 의한 제사승계와 함께 대대로 내려온 재산을 온전히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장손에게 더 많은 재산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현실론이 대두되면서 장자상속 중심으로 흘러감에 따라 남녀균분의 원칙은 깨지고 만다.
이때까지만 해도 보통 결혼은 남자가 여자의 집에 장가드는 '남귀여가혼(南歸女家婚)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동안까지도 처가에서 한동안 살았는데, 이 때문인지 몰라도 아직도 외가에 대한 추억과 그 친밀감이 더 깊은 것은 이 같은 오랜 전통의 습성인지도 모른다. 남녀균분의 원칙도 이러한 가족개념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해남윤씨가의 성립과 재산형성 과정을 살펴보면 남녀균분의 원칙이 매우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을 알 수 있는데 그 첫 번째 사례가 해남윤씨가의 중시조인 광전이 고려공민왕 3년(1354년) 아들 단학에게 남긴 <노비허여문기>에서 엿볼 수 있다.
광전은 아들 단학에게 '봉제사(奉祭祀)'의 목적으로 이 노비문건을 남기는데 노비문건에 나오는 노비는 광전의 처인 함양박씨가 데려온 신노비로 당시 남녀균분의 원칙에 의해 시집간 딸에게 분배된 종이었다.
또한 녹우당의 입향조인 어초은 윤효정은 남녀균분의 덕을 가장 많이 본 사람으로 당시 해남지역의 가장 큰 세력가이자 부호인 정호장의 딸에 장가를 들게 되어 분가를 하자 막대한 재산을 분배받아 녹우당에 튼튼한 기틀을 마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도 처가 덕을 잘 보면 경제적으로 쉽게 자리를 잡지만 당시는 제도적으로 만들어졌던 셈이다.
남녀균분에서 장자상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