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측스님의 위패가 있은 사당의 내부조수영
대웅전의 뒤로 거대한 대안탑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국의 절은 정문을 들어가면 탑이 나오고 그 다음에 대웅전이 나오지만 자은사는 다르다. 탑에 사리가 없기 때문에 탑이 대웅전 뒤에 나온다고 한다.
대안탑은 <대당서역기>를 쓴 현장법사가 17년간 인도를 다녀오면서 가져온 680여 건의 불교 경전을 번역하고 보관하기 위해 세운 탑이다. <대당자은사삼장법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652년 법사는 단문 남쪽에 석불탑을 만들어 서역에서 가져온 경장을 안치하고자 했다. 기공에 임박해서 법사는 친히 삼태기를 들고 벽돌을 운반했다. 이렇게 2년이 걸려 이 탑은 완성되었다."
건립 당시에는 5층의 인도식 불탑이었다고 하나 전란에 모두 소실되고 현재의 모습에서는 인도풍 불탑의 양식은 전혀 찾을 수 없다. 4각의 7층, 64m의 높이를 자랑하는 대안탑은 1층의 한 변의 길이가 25m이고 층수가 높아질수록 그 폭이 좁아진다.
1층 출입구의 좌우벽에는 태종이 내린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와 함께 황태자시절의 고종이 기술한 술성기명(述聖記銘)이 각각 새겨 있는데 당대의 명필이자 명재상인 저수량이 쓴 글씨로 더욱 유명하다.
탑 내부로 올라가니 각층의 사면에는 창을 내어 밖을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지금의 절터는 당 시대의 5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비록 당나라 때의 영광은 느낄 수 없지만 탑 남쪽을 막고 서 있는 법당과 좌우 건물, 더 남쪽으로 종루와 고루 등이 늘어선 모습은 옛 모습의 잔영을 보여준다.
탑의 높이에 대해서는 현장법사가 세웠을 당시는 5층이었으나, 측천무후 시절에 여자를 나타내는 짝수로 세우기 위해 10층으로 증축했고, 후에 명대에 이르러 지금의 7층 높이로 변형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소안탑, 대안탑과 대비되는 여성스러운 탑... 지진에 의해 파괴된 탑신
서안에는 대안탑과 더불어 소안탑(小雁塔, 샤오옌타)이 있다. 서로 연관성은 없지만 이곳 천복사에 있는 것이 크기 면에서 약간 작다는 이유로 소안탑으로 불린다. 천복사는 684년 당 고종이 죽은 후 헌복을 하기 위해 지어진 유명한 불교 사원이었다.
원래 이름도 헌복사(獻福寺)였는데, 무측천 때 천복사로 이름을 바꿨다. 이곳 소안탑 또한 당나라 승려 의정대사가 인도에 가서 경전을 얻어 귀국한 후 이곳에서 경전을 번역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원래는 15층 높이였으나 섬서성 대지진 때 훼손되어 현재는 43.3m의 13층탑이다. 사각형의 평면에 1층의 높이가 가장 길며 점차 올라갈수록 층의 높이가 낮아지면서 폭도 좁아지는 부드러운 곡선미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