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윤이상-루이제 린저의 대담>에 실린 윤이상 선생의 자필편지.한길사
마침 윤이상 선생은 DMZ에서 남북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음악제를 열자는 안을 내놓았다. 남과 북의 음악인들이 민족과 국토의 분단과 전쟁을 상징하는 바로 그곳에서, 음악으로 평화를 노래하자고 남과 북에 제의한 것이었다.
나는 우리 출판사가 선생의 음반을 직접 출반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음악전문 출판사 또는 음반회사들이 그걸 하지 않으니 우리가 해보자는 것이었다. 한길사는 책을 만드는 출판사이지만, 음반도 사실은 또 다른 책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고, 또 출판사가 음반을 기획하기도 하지 않는가.
나는 10월 6일부터 11일까지 베를린에 머물면서 윤 선생을 만나 우리 출판사가 선생의 음반을 직접 만들어 한국에 소개하겠다는 말씀을 드렸고, 선생은 흔쾌히 나의 제안에 동의했다. 실은 윤 선생도 나의 이러한 제안을 매우 놀라워하셨다. 한국의 이런저런 언론들이 선생의 동정에 대해 보도는 하고 있었지만, 그 보도들은 선생의 생각과 행동을 늘 왜곡하곤 했다. 선생은 사실은 한국의 미디어들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의 음악전집을 펴내겠다는 나의 제안은 여러 의미에서 선생님에게 하나의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윤이상 선생을 만나러 가는 나는 다소 긴장했다. 1956년 6월 유럽으로 유학 간 지(처음에는 프랑스로 갔다) 30년 이상이 흐른 지금 작곡가 윤이상 선생은 어떤 모습일까. 한편으로 궁금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세계의 음악가 윤이상 선생은 한국적인 편안한 할아버지였다. 베를린 숲 속에 있는 자택의 문 앞에서 선생은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맞아주었고, 집안의 풍경은 한국의 여느 곳과 같았다. 이웃집에 들러 즐겁게 환담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선생에겐 약간의 경상도 악센트가 남아 있었다. 선생은 나를 고향의 후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젊은 시절 통영의 풍경을 떠올리는 듯, 고향 이야기를 마구 쏟아냈다. 꿈꾸는 소년 같았다.
나는 윤이상 선생과의 첫 만남에서 또 다른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마침 10월 8일과 9일 베를린 필하모니홀에서는 연속으로 '윤이상 음악회'가 열렸는데 선생의 초대로 그 음악회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선생의 음악회가 열릴 때는 주최 측이 선생을 오게 함으로써 관객들의 열띤 갈채를 받게 되는데, 그날도 그러했다.
음악회가 끝난 후엔 연주자들과 회식을 했는데, 윤이상 선생은 나를 그들에게 소개했다. '한국에서 온 출판인인데, 나의 음악전집을 기획하기 위해 왔다'고. 나는 그때 윤이상 선생의 작품을 전문으로 연주하는 세계적인 오보에 연주자 하이츠 홀리거와 하프 연주자 우어줄라 홀리거 부부와 마주 앉아 저녁을 같이 했다.
10월 10일 나는 하루 종일 선생과 인터뷰하는 기회를 가졌다. 선생은 동베를린 사건을 비롯해 가슴에 묻어두고 있는 여러 가지를 털어놓았다. 나는 선생의 뜨거운 예술정신과 민족애에 감동했다. 선생과의 긴 인터뷰는 나의 첫 베를린 방문의 절정이었다.(인터뷰 내용은 이어지는 2편에서 자세하게 소개한다.)
<윤이상 선집>에서 <윤이상 음악전집>으로
나의 윤이상 선생 인터뷰는 막 창간된 <한겨레신문>에 게재됐다. 윤이상 선생의 예술관·민족관에 대해서 한국신문으로서는 가장 본격적으로 소개한 기사였을 것이다. 나는 이미 우리가 펴내는 월간 <사회와 사상> 88년 10월호에 윤이상·송두율 대담으로 '윤이상의 예술세계와 민족관'을 게재했다. 윤이상 선생의 음반을 내야 되겠다는 구상을 하면서 기획된 기사였다. 베를린으로 윤이상 선생을 방문하기 직전에 발행되었는데, 송두율 교수와의 대담에서 선생은 자신의 예술과 철학에 대해 깊이 있는 언급을 하고 있었다. 이 기사는 참으로 격조 있는 대담으로, 윤이상의 예술사상을 최초이자 체계적으로 국내에 소개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나는 <윤이상 선집> 정도로 구상했다. 그러나 베를린으로 가서 선생을 뵙고는 <윤이상 음악전집>을 기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일단 귀국했다가 1989년 2월 구정을 할애해 다시 베를린으로 갔다. 아내 박관순도 동행했다. 우리가 베를린을 방문하는 기간에 함석헌 선생님이 서거하셨다. 그래서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말았다.
선생의 작품과 자료가 방대하기 때문에 본격적인 작업이 필요했다. 전문가들에 의해 진행되어야할 작품해설도 보통문제가 아니었다. 독일에 유학 중인 한정숙씨(현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최성만씨(현 이화여대 독문학 교수), 홍은미씨(음악학) 등이 윤이상 선생 댁으로 모였다. 홍은미씨는 나중에 윤이상 선생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는데, 1주일 동안 출근하는 것처럼 윤이상 선생 댁에 모여 구성을 짜고 어떤 해설을 어떻게 붙일까를 토론했다. 물론 윤이상 선생과 함께였다. 기왕에 발표된 '윤이상 연구'를 조사했다.
하루를 할애해 윤이상 선생의 사진들을 정리했다. 선생은 대단한 기억력과 에너지를 갖고 계셨다. 오전 10시부터 시작해서 오후 6시까지 사진을 살펴보고 사진설명을 붙이는 작업을 진행했는데, 선생은 50장이 넘는 오래된 사진들의 내용을 아주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계셨고, 그 사진설명을 척척 해내는 문장가였다.
하루는 선생의 안내로 베를린예술대학의 윤이상 아카이브를 방문했다. 전임연구자를 두어 선생의 음악에 관한 모든 연구와 자료를 집성시키는 연구소였다. 윤이상 선생은 베를린예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임했다. 베를린예술대학은 윤 선생의 아카이브를 설립해서 학교 차원에서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사진을 비롯한 이런 저런 자료들을 갖고 귀국했다. 윤 선생이 윤이상 아카이브에서 확보해준 CD도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