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성영
행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데 인효 녀석이 지루한 표정으로 집에 가자고 칭얼거립니다. 녀석은 일주일에 두 차례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텔레비전을 봅니다. 유일하게 사극 드라마를 꼬박꼬박 시청하고 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인 것이었습니다. 사극 드라마 시간에 맞춰 집에 돌아가려면 행사를 끝까지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녀석의 귀에 바싹대고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너 그거 하나 못 참아, 드라마가 그렇게 중요해, 오늘이 마지막 촛불집횐데, 대추리 촛불집회는 이제 더는 참가 할 수 없지만 역사 드라마는 재방송도 볼 수 있고 또 앞으로도 얼마든지 많이 볼 수 있잖아."
녀석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녀석은 열셋, 어린 아이일 뿐이었습니다. 대추리에 도착하자마자 자주적이면서도 진취적인 역사의식으로 충만했던 녀석의 기상은 온데간데없이 사극에 빠져있었습니다.
진정성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촛불집회 30분을 남겨두고 슬그머니 자리를 떴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녀석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지, 말문을 닫아 버린 내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아빠."
"……."
"아빠!"
"…아빠 오늘 너한테 실망했어, 너 하구 말하기 싫어, 넌 말만 앞세우고 실행은 안허잖어, 그것도 못 참어, 드라마가 그렇게 중요해, 오늘이 마지막 촛불 집횐디…."
녀석은 더는 말이 없었습니다. 말 없는 녀석이 안쓰러워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내 자신이야 말로 대추리에 절망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한순간 '마지막 촛불집회'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희망의 자리였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가슴 속 깊은 곳에서는 희망보다는 절망의 뿌리가 더 깊이 박혀 있었던 것입니다. 정작 실망했다는 말은 내 자신에게 해야 할 말이었습니다.
내일 아침 녀석이 눈 비비고 일어나면 말해줘야겠습니다.
"아빠는 너 한데 실망하지 않았다. 니가 대추리에 간 것만 해도 아빠는 자랑스럽다. 다음에 또 가자."
| | "왜 우리는 이 땅을 지켜내지 못하는 것일까?" | | | 아들 인효가 학교 홈페이지에 올린 글 | | | | 다음 글은 큰 아들 송인효가 대추리에 다녀와 다음날 아침 학교 홈페이지에 올린 내용입니다. 촛불집회를 다 마치고 돌아오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했던 모양입니다.
어제 엄마, 아빠와 함께 대추리에 갔다. 대추리, 도두리에 곧 있으면 마을 주민들이 떠나고, 그곳에 미군기지가 세워진다고 한다. 대추리에 들어갈 때 우리나라 경찰들이 입구를 경비하고 있어 약간 무섭기도 하고, 남의 나라 기지를 지키고 있으니 화가 나기도 했다. 대추리 마을에 들어와 건너편의 미군기지를 보았는데 꼭 사진에서 본 남북의 휴전선 같이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또 곳곳에 대추리 사람들의 집들이 부서져 있었다. 그런 집들을 보니 화가 나고, 안타까웠다. 만약 우리 마을에 미군기지가 세워져 대추리 사람들처럼 내가 자란 정든 고향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대추리 사람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왜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땅에서 마음대로 살지 못하고, 미군들 때문에 떠나야만 할까? 왜 우리는 이 땅을 지켜내지 못하는 것일까? / 송인효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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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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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이 그렇게 중요해? 마지막 촛불집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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