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
그러나 이러한 양상은 탈아외교 제2기로 접어들어서면서 완전히 달라진다. 1894년부터 1945년까지를 망라하는 탈아외교 제2기에, 일본은 서양세력과 적극 경쟁하면서 경제·군사적 측면에서 동아시아 침탈을 강화하였다. 동아시아를 침탈했다는 점에서는 제1기와 다를 것이 없지만, 서양세력과 경쟁했다는 점에서 제1기와 차별성을 띤 시기였다.
청일전쟁(1894년) 이후 일본은 서양세력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정도가 아니라 서양세력과 적극 경쟁하면서 중국 등 대륙에 대한 침탈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러일전쟁(1904년)-제1차대전(1914년)-만주사변(1931년)-중일전쟁(1937년)-태평양전쟁(1941년) 등의 과정에서 일본은 서양을 제치고 중국무대의 최강자로 떠올랐다.
이 점은 중국무대에서의 세력판도의 변화를 분석함으로써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840년부터 1900년 전후까지 중국무대는 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의 ‘빅4’에 의해 지배되었다. 1902년 현재 중국에 투자된 외국자본은 총 15억 930만 달러였는데, 그중 일본자본은 5360만 달러로서 전체의 3.6%에 불과했다. 이때만 해도, 일본은 중국무대에서 후발주자에 불과했다.
이런 일본이 1911년 전후에는 영국·프랑스·미국·독일·러시아와 함께 ‘빅6’에,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영국·미국과 함께 ‘빅3’에, 만주사변 이후에는 미국과 함께 ‘빅2’에, 중일전쟁 이후에는 미국마저 제치고 ‘빅1’에 올랐다. 후발주자였던 일본이 서양의 강호들을 제치고 단시간에 중국무대에서 최강자로 떠오른 것이다. 일본이 미국·영국 등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데에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자신감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탈아외교에 한층 박차를 가한 인물이 바로 히로히토 국왕이었다. 이 점은 1927년 다나카 상주문(田中奏摺)의 채택으로도 알 수 있다.
“우리가 장래에 중국을 제압하고자 한다면 먼저 미국을 타도해야 하고, 중국을 정복하고자 한다면 먼저 만주와 몽골(滿蒙)을 정복해야 하며, 세계를 정복하고자 한다면 먼저 중국을 정복해야 합니다.”
위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다나카 상주문의 채택을 계기로 일본은 대미 타도를 지향하는 한편 대(對)중국 침략을 강화하였다. 일본이 중국침략에 이어 미국에까지 싸움을 건 것은 바로 히로히토 때의 다나카 상주문 채택 이후의 일이었다. ‘서양 천하’를 ‘일본 천하’로 바꾸기 위해 서양 강호들과 한판 대결을 벌이기로 작정한 것이다.
탈아외교 제2기는 한때는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한·중 두 민족의 항일전쟁과 미국의 원폭 투하로 인해 결국 파국으로 치닫고 말았다. 히로히토는 결국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해서 상황은 탈아외교 제3기로 접어든다. 1945년부터 현재까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1945년 이후 일본은 서양세력에 편승하여 경제적 측면에서 동아시아를 침탈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제3기는 서양에 대한 태도가 ‘편승’이라는 점에서 제1기와 같고 제2기와는 다르다. 그리고 동아시아 침탈 방식이 경제적 측면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제1기 및 제2기와 다르다. 탈아외교의 강도가 한 단계 낮아진 것이다. 침탈 방식이 과거와 달리 경제적 측면에 한정될 수밖에 없는 것은 평화헌법 하에서 일본의 대외 침략이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지금도 동아시아를 ‘침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일본이 여전히 오키나와를 점령하고 있고 한국 등을 자국의 경제적 하청으로 두고 있으며 또한 미국의 동아시아 침탈의 대리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의 동아시아 침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와 달라진 게 있다면, 미국의 비호 하에 그리고 미국에 편승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위와 같이 히로히토 국왕의 무조건 항복 이후 일본의 대외관계는 탈아외교 제3기로 전환했으며, 이러한 구도 하에서 일본은 미국에 적극 편승하면서 동아시아 역내에서 자국의 위상을 강화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최근 일본 내에서 ‘아시아로 돌아와야 한다’며 탈아외교 반성론이 제기되고 있는 것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일본은 여전히 1871년 이후의 탈아외교 기조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히로히토 국왕이 주된 전쟁상대였던 중국·한민족을 무시하고 미국에게만 항복을 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약 일본이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한민족에게도 항복을 했다면, 일본은 탈아외교 기조를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은 미국에게만 항복을 함으로써 탈아외교 기조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히로히토 국왕은 일대 위기 속에서 대미 추종을 통해 탈아외교를 한 단계 낮추고 미국의 보호를 받음으로써, 중국·한민족 등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머리를 숙일 뻔한 치욕을 모면하고 일본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었다.
그는 인간선언을 통해 자기 자신의 자존심은 버렸지만, 자기 조국의 ‘자존심’만은 끝내 지켜낸 인물이었다. 그는 서양 앞에서는 자존심을 굽혔지만, 동아시아 앞에서는 여전히 고개를 꼿꼿이 세웠다. 자존심 두 개는 버리고 자존심 하나는 지킨 셈이다.
야스쿠니·위안부·과거사·교과서 문제 등과 관련하여 한국·중국 등이 일본을 끊임없이 압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웃나라들에게 죄악을 저지른 일본이 미국의 비호 하에 이웃나라들 앞에서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있기 때문이다. 히로히토의 무조건 항복이 낳은 국제관계의 산물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공유하기
히로히토, 자존심 두 개는 버리고 하나는 건졌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