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
1954년 3월 7일 도쿄에서 열린 스위스 월드컵 1차 예선 때부터 1972년 7월 26일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제16회 메르데카컵 때까지 한국은 일본에 대해 20전 11승 6무 3패 36득점 19실점으로 압도적 우위를 유지했다.
그리고 한일정기전이 열린 기간인 1972년 9월부터 1991년 7월 27일까지 한국은 모든 유형의 한일전에서 30전 21승 5무 4패 53득점 20실점의 압도적 우위를 유지했다. 1972년 7월 26일까지의 패전율이 15%(20전 3패)였던 것에 비해, 이 기간의 패전율은 13%(30전 4패)로 다소 떨어졌다. 한국 축구는 친일군사정권의 기대대로 일본에 맞서 예전보다 더 잘 싸웠던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일전에 비해 한일정기전에서 한국 선수들이 더 잘 싸운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한일정기전에서만큼은 한국 선수들이 이를 악물고 사력을 다해 싸웠으므로 한국팀의 기록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분명 아니다.
1972~1991년의 30경기 중에서 15경기는 한일정기전이고 나머지 15경기는 일반 국제경기였다. 한국팀은 한일정기전에서는 15전 10승 2무 3패 25득점 13실점, 기타 일반 경기에서는 15전 11승 3무 1패 28득점 7실점의 성적을 거두었다. 일반 국제경기에 비해 한일정기전의 성적이 약간 저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일정기전에서는 한국팀의 실점(13실점)이 다른 경기(7실점)에 비해 두 배가량 많았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는 한국 선수들이 한일정기전에서 열심히 싸우긴 했지만, 다른 경기에 비해 부담을 더 많이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동시에 일본 선수들도 한일정기전 때에는 더 열심히 싸웠음을 보여 주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한일정기전이 없어진 1992년 이후로는 한국팀의 성적이 갑자기 뚝 떨어졌다. 18전 6승 7무 5패 19득점 18실점이라는 근소한 우위가 그것을 보여 준다. 1991년 이전의 압도적 우위가 불과 1년 새에 막상막하 관계로 돌변한 것이다.
그런데 1992년 이후의 한일전에서 친선경기(비정기)를 제외한 일반 국제대회의 성적을 보면 한국팀의 성적이 약간 더 저조함을 알 수 있다. 한일정기전이 없어진 지 6년 만에 열린 1997년 친선경기 이후 한국팀은 한일 친선경기에서 6전 3승 2무 1패 6득점 4실점의 근소한 우위를 거두었다. 하지만, 다이너스티컵·아시안게임·월드컵예선·동아시아대회에서는 12전 3승 5무 4패 13득점 14실점의 근소한 열세에 머물렀다. 친선경기를 제외한 나머지 국제대회에서는 한국이 약간 열세에 처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해석 여하에 따라서는, 1997년 이후의 한일 친선경기가 한국팀의 한일전 전적을 보충하는 기능을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친일군사정권 때의 한일정기전 때에는 일본팀이 평소보다 더 잘 싸웠지만, 1997년 이후의 비정기 한일전에서는 한국팀이 평소보다 더 잘 싸웠던 것이다.
반일감정을 활용한 박정희 친일정권
한국팀이 한일정기전 폐지 이후로 갑자기 성적이 저조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로는 1993년부터 친일군사정권이 문민정권으로 대체되었다는 점과 1993년 5월 15일부터 일본 프로축구 J리그가 출범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한일전 부담을 주던 친일군사정권이 사라진데다가 일본 축구의 실력이 크게 상승했기 때문 등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J리그 출범 이후 일본대표팀의 실력이 상승하는 데에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했으므로, 친일군사정권 종식 이후부터 한국팀의 성적이 갑자기 급강하한 주요인은 한일전에 목숨을 걸던 정권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992년 이후로 한일정기전이 열리지 않는다는 점도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김영삼 정권은 비록 친일군사정권의 후계자이기는 했지만, 과거 정권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민주적 정통성이 더 나은 정권이었고, 김대중 정권 이후로는 민주적 정통성의 시비가 사실상 사라진 상황이다. 친일군사정권에 비해 그 이후의 정권들은 스포츠를 통한 정통성 창출의 필요성을 덜 느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97~ 2003년에도 6차례의 한일 친선경기가 열리긴 했지만, 과거 한일정기전 만큼의 ‘열기’를 느끼기는 힘들 것이다.
“스포츠를 통한 정치적 효과의 산출은 이전 정권보다 지금 정권이 더 잘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런 오해를 낳는 데는 두 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는 매스 미디어나 영상기술의 발달, 스포츠와 상업의 접목 등으로 인해 스포츠와 대중의 밀착이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 분야가 아닌 미디어·상업 분야 등이 스포츠 열기를 주도하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2002년 월드컵 개최 때문에 한국인들의 스포츠 열기가 일시적으로 뜨거워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국민의 반일감정을 축구 한일전으로 분출시키고, 그 분출의 효과를 정치적으로 가장 잘 활용한 정권은 뜻밖에도 친일군사정권이었다. 상식대로라면 친일감정이 그 정권을 떠받쳤어야 하는데, 엉뚱하게도 반일감정이 떠받치고 있었던 것이다. 정통성이 약한 친일군사정권이 동·서 데탕트 이후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엉뚱하게도 국민의 반일감정을 잘 활용하였던 것이다.
국민의 반일감정을 분출시키면서도 독도·과거사 등의 한일관계를 제대로 해결한 게 거의 없다는 점을 볼 때, 친일군사정권은 반일감정을 이용하기만 했을 뿐 실제로 자신들에게 불리한 ‘반일 조치’는 거의 취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식민통치의 뼈아픈 경험에 바탕을 둔 반일감정을 교묘히 활용하면서도 얼마 되지 않은 식민통치 보상금마저 가로챘다는 점에서 박정희 친일정권이 얼마나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정권이었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유신세력은 대통령 박정희가 국민소득을 올리기 위해 추운 겨울에 내복도 입지 않고 산 적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국민의 ‘아픈 부위’까지 악용한 점을 볼 때에 대통령 박정희가 내복을 입지 않고 산 것은 국민을 위해서 아니라 그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였을 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짓은 남의 아픈 상처를 위로하는 척하면서 정작 남을 이용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진정으로 정통성 있는 정권이라면, 박정희 친일군사정권처럼 스포츠를 통해 국민을 인위적으로 통합하려 할 것이 아니라 양극화 해소 등의 실질적 방법으로 온 국민을 하나로 만드는 데에 더 주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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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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