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아천과 어루러진 모래언덕, 명사산. 바람이 부는 날엔 모래가 우는 소리를 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조수영
가욕관에서 돈황으로 가는 길, 하서주랑의 끝
우리는 지금 난주에서 돈황에 이르는 하서주랑의 서쪽 부분을 지나고 있다. 가욕관과 돈황은 고속도로로 이어져 있는데 공사 중이다. 내년 이맘때나 완공된다고 한다. 4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비포장길로 9시간을 달렸다. 온몸이 진동 맛사지를 한 것 같다.
돈황은 2천년 전부터 실크로드에서 가장 중요한 정거장 중에 하나였다. 중국의 학자들은 돈황을 '인후'에 비유한다. 마치 입에서 식도와 기도로 통하는 목구멍과 같다는 뜻이다.
고비사막과 기련산맥 사이로 있는 하서주랑을 거쳐 몰려드는 동방 문물이 이곳을 지나면 몇 갈래의 길로 갈라져서 빠져나가며, 반대로 그 길들을 거쳐 밀려오는 서역 문물은 이곳 돈황을 지나서야 동방에 전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말로 비유하면 병목이다.
동서무역의 중계점, 돈황(敦煌: 둔황)
돈황이라는 이름은 '성대하게 변영한다'는 의미이다. 의미 그대로 고비사막의 오아시스 도시로서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기원전 111년 한무제는 한반도가 있는 동쪽에는 한사군을 세우면서 돈황에 하서사군의 하나인 돈황군을 세웠다.
이후 한나라가 멸망하고 이 지역은 수백 년 동안 북방 이민족이 지배하게 된다. 티베트, 흉노, 선비 등이 지배 하에 있으면서 그들의 문화가 불상과 벽화의 양식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특히 당대 7세기부터 8세기 중엽에 걸친 시기에는 가장 왕래가 성해 동서무역의 중계지점으로서 문화의 꽃을 피우며 세계적인 '돈황예술'을 창출했다. 이미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막고굴의 천불동이 그 예다.
사막답지 않게 푸르고 싱싱한 면화와 과일밭이 눈길을 끈다. 기련산에서 내려오는 당하가 시내를 관통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돈황은 감숙성 최대의 면화와 과일 산지다. 아담한 오아시스 도시, 돈황은 오늘도 예나 다름없는 병목 구실을 한다. 중국의 주요 도시들을 연결하는 공항과 기차역으로 매일 수천 명씩의 사람들이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