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둠벙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어린시절 '아버지의 둠벙'이 떠오르곤 합니다.송성영
유년의 기억 속에도 둠벙이 하나 있었습니다.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으니 40년 전쯤 일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지금의 나처럼 산비탈에 밭을 일궜습니다. 그 밭 옆댕이에 둠벙이 있었습니다.
주변에 농사짓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온전히 ‘아버지의 둠벙’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둠벙은 우리 아버지가 화전을 일구기 이전부터 있어 왔는지 모릅니다. 언제 누가 만들어 놓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기에 당신 스스로 파 놓았는지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된 것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우리 아버지뿐만 아니라 온갖 생명들의 보금자리가 바로 둠벙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둠벙’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어린 내 머리끝까지 폭 싸일 만큼 아주 깊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큼직한 돌멩이를 던지면 ‘풍덩’ 소리가 났고 둠벙 가장자리에서 놀던 개구리들이 사방으로 달아났습니다.
잔잔한 수면 위에 물뱀이 곡선을 그려 놓곤 했던 그 둠벙은 산비탈을 꼬불꼬불 타고 내려가 마을 앞 너른 시냇물과 이어져 있었습니다. 둠벙에는 온갖 물고기들이 바글바글했습니다. 송사리도 있었고 미꾸라지에 실뱀장어도 있었습니다. 정확히 기억할 수 없으나 그냥 뱀장어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둠벙 속 고기들의 본래 고향은 마을 앞 너른 시냇물이었는지 모릅니다. 장마철에 물길을 타고 산아래 둠벙까지 거슬러 올라왔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들의 진짜 고향은 둠벙인지도 모릅니다. 둠벙에서 태어나 시냇가로 나갔다가 알을 낳기 위해 다시 돌아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내 어린 시절 둠벙은 산과 마을과 시냇물을 하나로 이어주고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에게 둠벙은 메마른 황무지를 젖혀주는 생명수나 다름없습니다. 아버지는 땀을 뻘뻘 흘리며 미군 철모로 만든 똥바가지로 둠벙에서 물을 퍼올려 밭작물을 키웠습니다.
나는 형과 함께 아버지의 산비탈 밭으로 막걸리 배달을 가곤 했습니다. 우리는 집에서부터 1㎞쯤 되는 산길을 걸어가며 힘에 부치는 막걸리 주전자를 번갈아 들곤 했습니다. 물론 호기심에 가다가 쉬다가 막걸리 한 모금씩을 홀짝거리기도 했지요.
한시라도 일손을 놓을 수 없었던 7남매의 우리 아버지, 아버지는 우리가 찾아가면 그때서야 일손을 놓았습니다. 둠벙 가에 보기 좋게 늘어져 있는 버드나무 그늘 아래에서 막걸리 몇 잔으로 달콤한 휴식을 취하곤 했습니다.
한 여름의 둠벙은 어린 자식들을 위한 아버지의 냉장고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땀을 뻘뻘 흘리며 밭에 도착해 소리 높여 아버지를 부르면 둠벙에 둥둥 떠 있는 참외며 수박이 먼저 반겼습니다.
아버지처럼 언젠가 내 놓아야 할 땅을 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