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군 정훈참모 시절(사진 왼쪽).
역마살이 끼어서였을까? 젊은 시절 난 한 고장에서 3년 이상 진득하게 살았던 적이 별로 없다. 그와 달리, 대구 2군 사령부에서는 1981년부터 4년 가까이 근무했으니 꽤 오랫동안 정착한 셈이다. 한 곳에 오래 살다보니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었다.
2군 예하의 부대들은 대개 민가 근처에 자리 잡고 있어서 항상 주민들과 밀접히 접촉하면서 임무를 수행한다. 평시 해안경계 임무를 수행할 때든, 지역에 간첩이 침투했을 때든 모든 작전은 주민이 면밀한 협조해야 성공할 수 있다. 따라서 주민들에게 진정으로 신뢰받는 군대가 되도록 노력하는 게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2군에서는 민·관·군의 원활한 협조를 각별히 강조했다. '방위협의회'를 구성해 정기적으로 회의를 여는 등 협조체제가 형식적으로는 잘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그 속내를 들여다 보면, 방위협조 명목으로 자금을 갹출해 지역에 주둔하는 군의 고급간부들과 지방 관리, 지역 유지들이 어울려 친목을 도모하는 윗사람들만의 친선 클럽처럼 운영되고 있었다. 그래서 2군 예하 사단에서 근무했던 고급간부들 중에는 지역 특산품이나 그 지역 유명 인사들의 그림이나 글씨 등을 선물 받아 소장하고 있는 분들이 많다.
요새는 NGO 단체가 활발하게 활동하는 지역도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이른바 '지방유지'라며 활동하는 분들 중 진실로 그 지역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은 드문 편이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로 오는 관리들에게 지역 정보를 제공하고 권력을 두둔하는 여론을 확산하는 오피니언 리더 역할을 하는 한편, 사적 기득권을 챙기면서 "나 어제 XXX 장군하고 한잔했지!"하고 으스대며 세도를 부리는 분들이 더 많았다.
일본 식민통치 시대부터 앞장서 권력의 편에 서며 자신들이 일반 국민들과 다른 특권층이라고 생각하는 권위주의 의식에 사로잡힌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주민들 편에 서서 주민들이 겪는 곤란을 해소하기 위해 부대에 요구하기보다는, 지역 내 군 부대장을 옹호하면서 주민들을 적당히 다독거리고 민·군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면 군 부대를 편들어 상황을 무마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 많았다.
절차 지켰으니 오인 사살 책임은 없다?
한 번은 동해안의 해안초소에서 야간 경계 근무 중 간첩이 침투하는 것으로 오인해 한 여인을 사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새벽녘에 해안의 바위 쪽에서 인기척을 발견한 초병이 수하를 했으나 응답이 없자 발포했는데, 확인해 보니 간첩이 아니라 미역을 따는 동리 아주머니였다는 것이다.
규칙과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결과적으로 간첩이 아니라 주민이 사살된,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런데 군에서는 간첩 침투를 방지하기 위해 철조망을 설치했고 초병이 절차에 따라 엄격히 경고했으나 응답이 없어 사격했으니 군이 책임질 일은 아니라는 분위기였다. 한마디로, 아낙네의 죽음이 당연하다는 듯 아무 관심이 없었다.
아무리 절차에 잘못이 없었더라도 결과적으로 무고한 양민 한 사람이 사살된 데 대해 부대도 깊이 반성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정상일 텐데도, 군에서는 초병이 근무를 잘 섰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했다. 꼭 무언가 숨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과연 꼭 총을 쏠 수밖에 없던 불가피한 상황이었는지, 잠결에 쏜 것은 아닌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불미스런 일을 저지르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지 등 여러 가능성에 대해 민·군이 합동으로 현장을 조사하고 지역 주민 대표들과 논의하는 게 옳았다. 군의 존재이유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있는 것 아닌가.
광주가 떠오른 까닭... "이곳 바닷가 사람들은 질이 안 좋아서..."
그러나 참모회의 전 환담 자리에서 당시 부사령관은 발포한 초병이 근무를 철저히 한 결과 생긴 일이니 훈장을 상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흥분했다. 난 '이 분들이 도대체 제정신인가' 생각하며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히 반대했다.
난 침투하는 적 하나를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주민에게 발포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간첩 하나가 들어왔다고 해서 나라가 통째로 흔들리는 것도 아닌데 인명을 경시해 과잉 대처한 것은 아닌지 등을 근본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 병사가 처벌받을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을 준다는 것은 정말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사건이자, 연관된 수많은 사람의 운명이 달린 심각한 문제인데도 몇몇 간부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를 무시했다.
부대 내에서 이런 사고와 의문사가 발생하면, 현장을 엄격히 보존하고 지역의 권위 있는 관련 시민단체 등이 즉각 참여해 함께 조사할 수 있도록 법적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이 법규를 근거로 사고 당사자가 책임을 직접 지도록 해야 한다. 사건만 발생하면 이른바 '지휘책임'이 막연하게 확대 적용되는 데 부담을 느끼고 사건을 감추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지휘관의 부담을 해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건이 생길 때마다 지휘관들이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며 사건을 축소, 은폐 혹은 조작하려 드는 경향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후 사건이 발생한 해당 부대의 연대장을 찾아가 만났다. 연대장은 "이곳 바닷가 사람들은 질이 안 좋아서…"라고 말했다. 주민들을 깔보는 부정적인 관점으로 매우 좋지 않게 말했다.
어쩌면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 만난 한 육사 출신 장교의 말과 이다지도 똑같을 수 있을까? 고뇌하는 빛도, 인간적인 동정심도 없이 "여기 분들의 기질이 어쩌고"하며 부정적으로 말하던 자세와 너무나 비슷했다. "당시 상황에서 발포는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니냐"며 심각하게 생각하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1980년 그 장교의 모습이 떠올라 연대장과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