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공부의 한 마디를 맺었다고 말하는 고미숙.조성일
낯선 책제목을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나비와 전사>의 책등에 박아놓은 문구다. 푸코를 '전사'로, 연암을 '나비'로 비유했다는 점에서 이 책을 '연암과 푸코'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은데, 어쨌든 연암과 푸코를 씨줄과 날줄로 삼아 근대의 심연을 탐색한다.
탈근대·근대·18세기라는 세 개의 그물망을 교차시켜 새로운 앎과 삶을 찾아나서는 이 책의 여정은 기차가 우리의 전통적 시공간을 어떻게 해체하고 근대적 시공간을 만들었는지를 탐색하는 것을 시작으로 '시공간-인간-성(性)-몸-앎-글쓰기'의 순서로 진행된다.
물론 각각의 주제가 따로 놀지만, 다른 주제들에 인접해 있으면서 때로는 엇갈리기도 하고 때로는 겹치기도 하면서 함께 어우러져 근대의 출구를 향해 나간다. '입구'에서 '오늘 여기에서의 삶'의 이야기를 물음으로 던지고, '출구'에서 '미래 거기의 삶'으로 날아가는 비전을 담아내는 형식이다.
"처음 공부를 시작하며 이 책을 구상할 때는 '근대성에 대한 계보학적 탐구'였는데,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사유가 달라져 처음 의도와는 사뭇 다른 책이 되었습니다."
그렇다. 고미숙이 텍스트로 삼은 근대가 우리에게 준 것은 균질화된 지식과 사유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이 균질화된 근대적 사유에서 고미숙이 일탈(?)할 수 있었던 것은 고미숙이 코뮌적 지식인 공동체 공간 '수유+너머'의 정서적 분위기를 한껏 타면서 강의·발표·세미나를 거치는 동안 이질적인 것들이 다양하게 섞여들어와 비빔밥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일 터이다.
연암의 내공은 유머에서 나온다
"잘 다듬어지고 완결된 학술적 보고서가 아니라, 이질적인 말과 사물들이 충돌하는 '활발발(活潑潑)한' 다큐멘터리로 감상되기를 기원한다."
고미숙은 많은 사람들이 근대나 푸코, 연암과 같은 용어 때문에 딱딱한 학술서라는 선입견을 가질까봐 그런 책이 아니라고 먼저 선을 긋는다.
그러면서 고미숙은 이 책을, '앎과 혁명'을 다시 구성하는 길 위에 설 수 있도록 매혹적인 갈림길을 마련해준 두 사우인 연암과 푸코에 대한 '헌정 앨범'이라고 했다.
"푸코의 고고학적 삽질을 보고 역사를 보는 눈을 배웠고 그러면서 연암을 만났는데, 푸코를 통해 '열하일기'를 보니까 이건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푸코는 근대성이 얼마나 견고한 요새로 둘러싸여 있는지를, 연암은 그 요새를 돌파하는 것이 얼마나 유쾌한 질주인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고미숙은 단지 명문장가나 실학자 정도로만 여기던 연암을 천의 얼굴을 가진 지식인으로 평가하면서, '천재와 범부의 경계를 깨뜨린 존경과 감동의 인물'로 치켜세운다.
"연암의 내공은 어깨에 힘주고 비분강개하는 것이 아니고 평이한 일상을 통해 세상의 심연을 보는 눈이 있습니다. 그래서 연암의 시선은 어떤 대상과도 만나고 접속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가로지르기에 능수능란한 선비였습니다."
고미숙이 말하는 연암의 이 범접할 수 없는 내공의 힘은 유머다. 자기를 틀에 가두지 않는 그런 유머를 구사한다. '세상 사람들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유머'라는 달라이라마의 사유와도 맞닿아있다.
"한·미 FTA라니, 우리는 근대적 '욕망의 노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