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에서 이룬 라인강의 기적 베를린 시청 2층에 전시된 1943년, 1953년, 1989년, 2004년에 찍은 베를린 위성사진.오마이뉴스 김당
1945년 여름, 호리호리해 다소 약해 보이는 한 젊은이가 포레스털 미 해군장관과 함께 파리에서 C-54 전용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향했다.
독일 상공에서 내려다본 작은 마을과 들녘은 평화로워 보였으나 프랑크푸르트 같은 대도시의 중심부는 맨바닥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온통 잿빛의 폐허 그 자체였다.
베를린은 온전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 한 채도 없을 만큼 아수라장이었다. 400만 명 이상 되는 인구 중 절반 가량이 전사했다. 살아남은 어린이와 노인들은 대부분 영양실조에 걸려 있었다.
전후 유럽-국제질서 규정한 샌프란시스코·포츠담 회담을 취재한 케네디 기자
미국 신문재벌 허스트 계열사의 신문기자인 이 젊은이는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교외의 포츠담으로 향했다. 전후 유엔(UN)을 탄생시킨 샌프란시스코 회담 취재를 막 끝낸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독일 항복 이후의 유럽 정국을 집중 취재하라는 것이었다.
그해 7월 미·영·소 열강의 3국회담이 포츠담에서 열렸다. 베를린에서 25마일쯤 떨어진 포츠담은 덜 파괴된 덕분에 2차대전 막바지에 참전해 '전후 요리의 숟가락'을 꼽은 소련이 이곳을 회담지로 선택했고, 그 때문에 스탈린 총리와 처칠 수상 그리고 트루먼 대통령 3인은 포츠담 인근의 궁전 같은 저택에 여장을 풀었다.
회담의 목적은 전후 유럽 문제와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냉전의 출발점이 되고 말았다.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회담이 열리는 동안 영국의 수상은 처칠에서 애틀리로 바뀌었으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로 사전에 주요 현안들에 대해 제대로 브리핑도 받지 못한 채 부리나케 온 트루먼은 세계사의 한 획을 긋게 되는 역사의 현장에서 회담 대표들이 바뀌는 것을 지켜본 허스트사의 신문기자보다 소련의 점증하는 위협 같은 현안에 대해 더 무지했다.
이 신출내기 기자가 나중에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하버드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뒤에 해군에 입대해 참전한 케네디 중위는 45년 3월 척추장애가 재발해 3년 6개월간의 현역복무를 마치고 전역해 언론계에 진출한다.
그리고 신문재벌 허스트와 가까운 아버지 조셉 케네디의 주선으로 그해 4, 5월에 세계사의 한 획을 그은 샌프란시스코회담을 참관하고 곧이어 2차대전후의 독일의 장래와 유럽의 정치질서를 결정한 역사의 현장으로 날아온 것이다. 이때의 현장기록은 나중에 <리더십의 서곡--1945년 여름 존 F 케네디의 유럽일기>(한국어 번역판은 <대통령이 된 기자>)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러나 그의 기자 생활은 1년도 채 안되는 짧은 기간에 끝났다. 하버드 대학 시절부터 꿈꾸었던 기자·문필가에서 곧바로 정치인이 되기로 인생의 계획표를 수정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케네디 자신도 얘기했지만, 케네디를 정치의 세계로 이끈 요인은 케네디가(家)의 정치재목으로 키운 맏형 조의 갑작스런 사망과 샌프란시스코와 포츠담에서 특파원으로 활동할 당시 그가 얻었던 경험이었다.
주영 미국대사를 지낸 유력한 재력가 아버지를 둔 덕분에 군에서 막 제대한 신출 기자임에도 종전후 거물급 정치 지도자들의 활동현장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며 현직 및 장래의 지도자들과 접촉할 수 있었던 케네디는 그때까지 고려했던 정치평론가나 문필가 혹은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려던 진로를 접고 정치가가 되는 것이 더 많은 만족을 얻을 수 있고 더 효과적인 봉사를 해낼 수 있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세계사의 한 획을 긋게 되는 역사의 현장에서 회담이 열리기 직전에 미국 대통령이 서거하고 회담이 열리는 중간에 영국 수상이 교체되는 것을 지켜본 경험론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사실은 훗날 대통령 자리를 이어받을 두 명의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과 포츠담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다. 트루먼을 승계한 아이젠하워 장군과, 포츠담에서 이뤄진 두 사람의 역사적 결단과 조언을 옆에서 지켜보고 나중에는 아이젠하워의 뒤를 이어 백악관의 주인이 된 케네디가 그들이다. 3명의 미국 대통령이 나란히 포츠담의 역사적 현장에 있었던 것이다.
케네디 "오늘 자유세계서 가장 자랑스런 긍지는 '나는 베를린 시민'이란 점이다"
케네디는 이듬해인 46년 메사추세츠 11선거구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하원의원이 된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살 때의 일이다. 이후 3선 의원이 된 케네디는 60년 대통령 출마를 공식 선언하고 "우리는 뉴 프론티어의 끝에 서 있습니다"(We stand on the edge of a New Frontier.)라는 명연설로 청중을 사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