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비우고 사는 계절이 아닐까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55) 겨울 산길 들길을 거닐면서

등록 2004.11.24 12:21수정 2004.11.24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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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걷이가 끝난 텅 빈 겨울 들판
가을걷이가 끝난 텅 빈 겨울 들판박도
쓸쓸한 겨울 산길 들길


산촌의 겨울은 빠르다고 한다. 아침에 뜰로 나가자 플라스틱 대야에 담긴 물이 꽁꽁 얼었다. 입동이 지난 지 오래고 엊그제 소설이 지났으니 이제는 추울 때도 되었다. 늘 책상에서 궁싯거리기도 따분해서 오늘은 산길 들길을 쏘다녔다.

산촌의 산길 들길은 고즈넉하기 그지없다. 어쩌다가 사람을 마주칠 뿐 오히려 까마귀나 까치, 산꿩 같은 날짐승이나 다람쥐 같은 산짐승을 더 자주 만난다.

떨잎을 떨궈버린 앙상한 자작나무들
떨잎을 떨궈버린 앙상한 자작나무들박도
내가 사는 고장은 앞도 산이요, 뒤도 산, 좌도 산, 우도 산으로, 눈만 뜨면 보이는 것은 온 통 산으로, 그야말로 산속에 살고 있다.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산은 네 계절 모두 볼만하다. 때로는 그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서 눈으로 다 보지 못하고 마음에 담아두기도 한다.

사실 이런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면 낯설고 물선 이 산촌에 살 수 없다. 때때로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까무러칠 정도의 아름다움에 혼자서 탐닉하곤 한다.


요즘의 겨울 산은 나무들이 떨잎을 죄다 떨어트려서 쓸쓸하기 그지없다. 앙상하게 벌거벗고 있는 그 모습이 썰렁해 보이지만 곧 함박눈이 내려서 앙상한 나뭇가지는 온통 눈꽃을 피울 것이다.

겨울의 들길은 황량하기 그지없다. 가을걷이가 모두 끝나 들판은 텅 비어 있다. 봄부터 가을까지 들판을 채웠던 곡식들이 모두 거둬지고 그루터기만 남아 있다. 텅 빈 들판이 썰렁해 보이지만, 이 겨울에도 들판이 가득 차 있다고 가정해 보면 더욱 그 풍경이 더욱 을씨년스러울 것 같다.


자연은 일년에 한 번씩 가진 것을 모두 비우나 보다. 이것이 대자연의 순리인가 보다. 사람도 이따금 한 번씩 비워야 건강하게 사는 비결일 게다. 비워버릴 때는 가재도구와 같은 물질과 그동안 쌓였던 정신적인 여러 상념들도 같이 떨쳐버려야 한다.

녹음을 잃어버린 쓸쓸한 겨울산
녹음을 잃어버린 쓸쓸한 겨울산박도
현대인들은 너무 많은 것은 가지고 산다

요즘 현대인들은 너무 많은 것은 가지고 산다. 친구 부인이 서울에서 남편의 직장 관계로 제천으로 내려가서 아이들 때문에 두 곳 살림을 하다가, 최근에 남편의 퇴임으로 다시 서울로 살림을 합쳤다고 했다. 제천을 떠날 때는 그 곳의 살림은 버리다시피 떠나왔는데도 사는데 전혀 불편치 않다면서 그동안 그 가재도구에 골몰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얘기를 하였다.

나도 서울에서 문패를 달고 30여 년간 한 번도 이사를 하지 않고 한 집에서 살다가 몇 해 전 집이 너무 낡아서 대대적으로 보수를 했다. 그때 다락방에서 나온 가재도구가 엄청 많았다. 누구네 개업 기념으로 받은 그릇이나 소품, 그리고 버리기에 아까워서 갈무리한 가재도구들이었다. 그것들을 빈 터에 쌓아두었다가 미화원 아저씨에게 따로 웃돈을 드리고 몽땅 치워버렸다.

살림살이만 그런 게 아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다. 올 초 미국에서 40여 일 지내면서 살펴본 바, 미국사람들 중 너더댓 사람에 한 사람 꼴은 이상 비만자였다. 어떤 이는 200킬로그램이 될 정도로 자기 몸도 주체치 못했다. 이런 비만이 우리나라에까지 옮아와서 우리 사회 언저리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빈 논에서 모이를 찾는 닭들
빈 논에서 모이를 찾는 닭들박도
그와 반면에 세상 참 고르지 않다. 몇 해 전 전, 중국 선양의 어둑한 밤길에서 누군가 우리 일행의 앞길을 막았다.
“선생님들, 남조선에서 오셨어요?”
15세 가량의 깡마른 소년이었다. 그는 서슴없이 손을 내밀었다.
“저는 북조선에서 온 꽃제비예요.”
소년의 눈빛이 너무나 애잔했다. 우리 일행은 주머니를 뒤져 몇 푼을 그 소년의 손에 쥐어주었다. 지구촌 한 곳에서는 비만으로 신음하고 있고, 다른 한 쪽에서는 식량난으로 굶주리고 있다.

그런데도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지려고 아귀다툼이다. 제 몸의 체중도 주체치 못하고 헉헉거리면서 깡마른 소년의 쪽박까지 깨트리려고 한다.

떨잎이 떨어진 썰렁한 산길, 가을걷이가 끝난 텅 빈 들길을 거닐며 가재도구도 내 몸과 마음도 이따금 비우고 살아야 건강하게 사는 비결임을 깨달으며, 참다운 하늘의 뜻을 곰곰 생각해 보았다.

겨울은 비우고 사는 계절이 아닐까?

봄을 기다리는 싹들
봄을 기다리는 싹들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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