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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외고의 1층 교무실.
 A외고의 1층 교무실.
ⓒ 윤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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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역 한 유명 외국어고(외고)에 초비상이 걸렸다. 평소 '천재' 학생으로 불리던 이 학교 2학년 순광(가명)군이 기말고사 시험지를 훔친 사실이 CCTV 판독을 통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해 전교 최상위권과 학과 1등을 독차지하던 학생이어서 충격을 더해주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지난 1월 중순쯤 A외고에 대한 종합감사를 벌여 관련 사실을 최종 확인한 것으로 27일 드러났다. 시험 관리 책임을 물어 이 학교 교원 4명에 대한 징계 의결도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순광군은 지난해 12월 말 퇴학 처분을 받아 학교에 나오지 못하고 있다.

현재 서울에는 모두 6개의 외고가 있다.

다음은 서울시교육청 감사관실, A외고 교장과 교감, 교무부장, 순광군의 담임 교사, 이 학교 학부모와 학생 등의 증언을 종합해 당시 상황을 재구성한 것이다.

천재 외고학생, 얼굴도 가리지 않은 채 교무실 문을 따다

지난해 12월 14일부터 16일, 밤 11시 30분. 적막한 A외고 운동장 구석에 한 남학생이 숨어 있었다. 밤 10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끝낸 순광군이었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떨리는 손으로 학교 본관 건물을 기어올랐다. 2m 높이에 있는 1층 창문을 열기 위해서다. "스르륵…".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잠기지 않은 창문을 찾아냈다. 복도 잠입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1층 복도 현관 쪽엔 교무실 쪽을 비추는 CCTV가 있다. 나중에 이 CCTV를 확인한 시교육청 감사관실 관계자와 A외고 교원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복면'도 쓰지 않고 교복을 그대로 입은 순광군이 교무실 문을 따고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순광군은 교무실 컴퓨터를 켰다. 비밀번호 때문에 부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비밀번호를 푸는 것은 '컴퓨터 도사'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USB 저장장치를 컴퓨터에 꽂았다. 2학기 기말고사 문제지와 정답지를 옮기기 위해서였다.

A외고 교원은 순광군이 시험지를 빼낸 과목은 영어와 스페인어 등 모두 3과목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또 다른 교원과 시교육청 관계자는 '스페인어 한 과목만 갖고 나온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혀 증언이 일치하지 않았다.

이 학교 한 교원은 "순광군이 지난해 12월 23일까지 일주일간 치른 기말고사 13과목 가운데 100점을 맞은 과목은 3∼4개였다"고 말했다.

"시험지 갖고 나온 것 다 이해... 우리도 힘들다"

A외고 1층 현관 쪽에 있는 CCTV.
 A외고 1층 현관 쪽에 있는 CC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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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광군의 시험지 절도 사건이 밝혀진 것은 기말고사가 끝난 직후. 한 학부모는 "순광이가 영어 정답지에 잘못 적힌 답과 똑같은 답을 2개 적은 것을 수상히 여긴 친구가 학교에 신고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학교 교원은 "자녀의 말을 들은 학부모가 신고해 시험지를 빼낸 사실을 발견했다"고 했다.

시교육청 종합감사 결과도 학교의 보고 때문이 아니라 학부모의 민원 제기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4일 오전 11시 40분, A외고 본관 현관에 한 남학생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이 학생(1학년)은 다음처럼 말한 뒤 고개를 숙였다.

"순광이형이 시험지를 갖고 나온 것 다 이해한다. 우리도 마음이 같다. 어머니, 아버지의 기대가 너무 크고 서울대도 가야 하니까. 나도 너무 힘들다."

실제로 순광군은 평소 '누나가 다니는 서울대에 가야 한다'고 말하는 등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한다. 어린 학생의 시험지 절도 배경엔 명문대 입학을 끊임없이 강요하는 주변의 압박이 있었던 것이다.

이 학교 한 교원은 "순광이는 교우관계도 좋고 생활 태도도 반듯했다"면서 "서울대를 다니는 누나와 비교되는 것을 두려워한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교원도 "순광이는 천재였다, 꼭 서울대를 갈 만한 아이라고 생각했다"면서 "솔직히 학업 때문에 우울증에 걸리거나 다른 험한 선택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시험지를 훔친 게 더 낫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입시 싸움 시키는 것이 더욱 무자비한 폭력"

A외고 2층 복도 벽에 걸린 대학 진학정보게시판.
 A외고 2층 복도 벽에 걸린 대학 진학정보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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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외고 말고도 외고와 자율형사립고(자사고) 등 이른바 '영재' 학생들을 모아놓은 학교에서 시험 부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명문대의 수시 입시전형 비율이 높아지면서 외고 등 특수목적고 학생들의 내신 전쟁이 한층 치열해진 탓이다.

2007년엔 교사가 김포외고 입시 문제를 학원에 통째로 유출했다. 2010년 7월 서울시교육청은 자사고인 D고에서 1학기 기말고사 시험지를 학교운영위원장의 자녀인 A학생에게 유출했다는 제보를 받고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지난해 2월 인천경찰청은 대학수학능력 모의 평가 시험지를 유출한 혐의로 이 지역 I외고 교사 4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통계청 '사회조사 2010'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이 가장 크게 고민하는 문제는 55.3%가 공부(성적, 적성)였다. 반면, 학교폭력은 0.2%로 최하위권이었다. 입시 '올인' 학교인 외고 학생들의 공부 스트레스는 더 클 것으로 보인다.

손충모 전교조 대변인은 "이른바 잘 사는 집 아이들을 영재라는 이름으로 뽑아 소싸움 시키듯 입시 싸움을 시키는 외고와 자사고 등의 폭력이야말로 정말 무자비한 폭력"이라고 우려했다.

덧붙이는 글 | 인터넷<교육희망>(news.eduhope.net)에도 보냈습니다.



태그:#외고생시험지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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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교육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살아움직이며실천하는진짜기자'가 꿈입니다. 제보는 bulg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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